입원 50일차, 항암 6회, 방사선 치료 30회. (25.08.12 치료 완료)
아침 창밖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병실 안으로 스며드는 순간, 나는 다시 하루를 시작했다. 바람의 결이 달라지고 그 온도가 미묘하게 달라졌다는 사실만으로 계절이 옮겨가고 있음을 깨닫는다.
끈적이던 침은 이제 사라졌지만 반대로 침이 마르면서 건조해진 목이 또다른 불편함을 전한다.
잠시라도 물로 적셔주지 않으면 갈라지는 듯한 아픔이 찾아오고 그때마다 몸은 신호를 보낸다. 치료를 처음 시작했을 때의 낯선 통증이 다시 불쑥 되살아난 듯하다.
마치 시간이 거꾸로 흘러 내가 처음의 지점으로 되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러나 이번에는 다르다.
그때와 달리 나는 이미 가장 고통스러운 파도를 건너왔다. 익숙해진 고통은 더 이상 나를 집어삼키지 못한다.
이 정도라면 버틸 수 있다는 마음이 오늘의 나를 지탱한다. 고통이 되돌아와도 두려움이 아닌, 감당할 수 있는 무게로 다가오는 것.
그것이 내가 지나온 시간들이 남긴 흔적이자 앞으로 나아갈 힘이라는 생각을 했다.
오늘부터 이유식이 아닌 정상 환자식이 배식 받았다. 숟가락을 들어 올리는 순간, 나도 모르게 작은 설렘이 스쳤다. 그러나 여전히 미각은 돌아오지 않았다.
달라진 게 있다면 이제는 쓴맛 대신 짠맛이 강하게 느껴진다는 점이었다. 입안에서 짠맛이 흘러나와 간이 조금이라도 된 음식은 모두 지나치게 짜게 느껴졌다.
그래서 대부분의 음식은 도저히 삼킬 수가 없었다. 결국 숭늉에 밥을 말아 넘기거나 간이 거의 없는 떡국 정도가 오늘 나의 식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과정을 일종의 연습이라 여기기로 했다. 아직은 미각이 내 편이 아니지만 조금씩 일상의 음식을 위에 담아내는 일은 곧 회복으로 향하는 또 다른 걸음이 될 것이니까.
음식을 맛으로 먹는 대신 살아있음의 증거로 받아들이는 지금의 내가 언젠가 다시 미소 지으며 밥상을 마주할 날을 기다리며 오늘도 천천히 젓가락을 들었다.
오전에는 요양병원 원장과 면담을 했다. 입원 자체가 내가 원해서 결정한 일이었으니 퇴원 날짜도 결국은 내가 정할 몫이었다.
다만 혼자가 아닌 의료진과 상의 끝에 오는 21일 목요일로 최종 퇴원일을 확정했다. 날짜를 확정하고 나니 문득 오늘이 입원 50일째 되는 날이라는 사실이 마음에 와닿았다.
50일이라니.
숫자만 놓고 보면 짧다면 짧은 시간일 수도 있지만 내게는 한없이 길고 고통스러웠던 여정이었다. 끝이 보이는 순간이 오기까지 매일이 몇 배로 무겁게 흘러간 듯하다.
원장은 퇴원 후에도 항암제, 영양제, 면역강화제 같은 보조약들을 꾸준히 챙겨야 한다며 치료가 끝났다고 방심하지 말라는 당부를 남겼다.
그리고 병실 문을 나서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이상하게도 안도와 두려움이 동시에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긴 병원생활의 막이 내리고 다시 집이라는 무대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이 아직은 낯설게만 다가왔다.
상담을 마치고 병실로 돌아와 1차 짐을 정리했다. 병원과 병실만 오가던 생활이었는데도 어느새 짐은 처음 들어올 때보다 훨씬 불어나 있었다.
그래서 택배 상자를 꺼내 처방받은 약들과 이유식, 그리고 이곳에서 새로 주문해 읽던 책들을 차곡차곡 담아 대구 집으로 보냈다.
불과 50일 전,
치료라는 희망 하나를 붙잡고 커다란 캐리어를 끌고 들어와 이곳저곳에 풀어놓던 내 모습이 선명하다.
그런데 이제는 그 짐을 다시 싸서 집으로 돌려보내는 순간에 서 있다. 시작과 끝이 겹쳐지는 이 아이러니 속에서 눈물이 불쑥 차올랐다.
그 눈물에는 끝까지 버텨낸 나에 대한 안도도 여전히 남은 불안도 그리고 드디어 집으로 향한다는 사실에 대한 묘한 떨림도 함께 섞여 있었다.
병원이라는 낯선 집에서 보낸 50일은 결코 가볍지 않았지만 이 무게를 짊어진 만큼 앞으로의 길은 더 단단해질 것이라는 희망을 마음속 깊이 새겨본다.
퇴원날짜를 확정하고 짐까지 정리한 오늘, 나는 문득 낯선 갈림길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병원이라는 울타리 안에서의 50일은 힘들었지만 동시에 안전했다.
아프면 간호사를 부르면 됐고, 약은 제때 주어졌다. 이제 그 울타리를 벗어나야 한다는 사실은 자유로움이자 동시에 두려움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면 환자라는 이름 대신 다시 생활인 으로서의 시간이 시작될 것이다.
익숙한 공간으로 돌아간다는 건 분명 설레는 일이지만 치료의 후유증을 안고 그 일상 속에 스스로를 다시 세워야 한다는 막연한 불안이 따라붙는다.
나는 다시 일어설 수 있을까 혹은 집이라는 공간이 나를 더 외롭게 만들지는 않을까.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희망이 고개를 든다. 비록 목은 여전히 건조하고 미각은 제멋대로지만 나는 이미 여기까지 걸어왔다.
병원에 첫 발을 들였던 그날의 두려움과 비교하면 지금의 나는 분명 더 강해져 있다.
오늘의 눈물은 두려움만의 눈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아마도 희망과 두려움이 뒤섞여 흘러나온 다시 살아가겠다는 다짐의 눈물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믿기로 했다. 퇴원 후의 삶이 낯설고 때로는 아프더라도 그 길 끝에는 다시 나의 일상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것을.
오늘의 일기를 이렇게 마무리한다.
두려움과 희망이 공존하는 지금, 나는 그 두 감정 모두를 껴안은 채 내일을 향해 나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