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도암으로 인한 항암과 방사선 치료 후 퇴원 20일차의 기록
새벽부터 내린 강한 빗줄기가 유리창을 두드렸다. 모여든 빗물이 배수구로 흘러내리는 소리가 어우러져, 마치 계절을 환영하는 하모니처럼 울려 퍼졌다.
그 소리에 마음이 잠시 멈추었고 나는 서재 창문을 살짝 열었다. 틈새로 들어온 빗소리가 온몸을 감싸며 내 안의 리듬을 바꾸어 놓았다.
조금씩 회복되고 있는 것일까. 이제는 적어도 두 시간 정도는 이어서 잠을 잘 수 있다.
여전히 목의 건조함과 화장실 문제로 새벽에 몸을 일으키지만, 완전 불면의 밤은 서서히 사라지고 있다. 그 것만으로도 안도의 기분이 찾아온다.
이른 새벽 ‘기억’이라는 단어를 붙들고 글을 옮겨 적었다. 분주한 두 사람의 출근길을 배웅하고 난 뒤 소파에 앉아 빗소리를 다시 들었다.
굵은 빗줄기는 그칠 줄 모르고 창가를 때렸고, 살짝 열린 창문 틈 사이로 냉기를 품은 바람이 밀려들어왔다.
오전에는 새로운 책을 꺼내 들고, 간단히 운동을 이어갔다. 2주차에 접어든 운동은 이제 근육통 없이 제법 몸에 익었다.
더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욕심을 애써 내려놓고, 지난주보다 5%정도만 강도를 높인 채로 마무리했다. 몸이 허락하는 만큼만 그것이 지금의 나를 지켜내는 방식임을 알기에 빗줄기와 함께 흘러간 오전은 욕심을 내려놓는 연습으로 남았다.
운동을 마치고 점심을 챙겨먹고 정리를 한 뒤 오늘은 그저 빗소리를 느끼며 시간을 흘려보냈다. 하지만 문득 허전함이 스쳤고 오랜만에 서재의 책상에 앉아 음악을 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튜브를 켰는데, 한동안 자주 듣던 카테고리에 이승철의 노래가 보였다. 그 순간 작년 이맘때 즈음이 떠올랐다. 회사를 그만두기로 마음먹고 무언가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던 시기였다.
매일 같은 길을 오가며, 어떻게 앞으로의 삶을 그려야 할지 고민하던 날들.
그때 우연히 듣게 된 노래가 이승철의 〈아마추어〉였다. 한 달 가까이 매일 출퇴근길에 이 노래를 반복해 들으며 내 선택을 스스로 다독이고 응원했던 기억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아마추어아티스트이승철발매일2012.09.28.
오늘 창밖에 내리는 빗소리와 그 노래가 겹쳐 들리자, 다시금 묘한 감정이 밀려왔다. 그때의 불안과 설렘, 그리고 지금 내가 지나고 있는 또 다른 길이 서로 겹쳐지며, 삶은 늘 이렇게 새로운 국면을 열어가는 과정이라는 것을 깨닫게 했다.
특히〈아마추어〉의 가사 중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기에, 모두가 처음 서 보기 때문에, 우리는 세상이란 무대에서 모두다 같은 아마추어야”라는 부분을 들을 때면 이상하게 가슴속 깊은 곳이 뭉클해졌다.
그 감정은 작년의 나에게도, 오늘의 나에게도 여전히 같은 무게로 밀려왔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그때는 불안과 두려움 속에서 붙잡았던 가사였다.
그러나 지금은 회복의 길 위에서 다시 맞이하는 울림이라는 것이다. 같은 노래가 다른 의미로 다가올 수 있다는 사실이 새삼 위로가 되었다.
누구도 이 길을 대신 걸어줄 수 없고 정답도 없다. 병 앞에서 흔들리는 지금의 나 또한 그저 무대 위에 선 또 하나의 아마추어일 뿐이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사실이 위안처럼 다가왔다.
인생이라는 무대 위에서 처음부터 완벽하게 연기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것을 이제야 조금은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늘 잘하려 애쓰며 남보다 뒤처지지 않으려 몸부림쳐왔다. 그러나 병이라는 사건 앞에서 알게 된 것은 잘하는 것보다 중요한 게 있다는 것이다. 그건 바로 지금 여기서 흔들리지 않고 서 있는 것이었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고 매끄럽지 않아도 괜찮다. 오늘 하루를 내 자리에서 나답게 버티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사실이 마음에 스며들었다.
생각해 보니, 버틴다는 건 단순히 시간을 견디는 것이 아니었다. 불완전한 나 자신을 인정하고 있는 힘껏 하루를 살아내는 것. 그 안에서 나는 조금씩 단단해지고 내일을 기대할 수 있는 작은 힘을 얻는다.
어쩌면 인생이란 원래 거대한 무대 위에서 모두가 서툰 아마추어로 살아가는 과정일지 모른다. 아직 부족하고 흔들려도 나는 여전히 배워가며 살아간다.
그리고 그 배움의 과정 속에서, 언젠가는 오늘의 붉어진 눈시울 마저도 빛나는 한 장면으로 기억될 것이다. 감성적이지 않으려 애쓰지만 요즘 들어 부쩍 감성적으로 변해버린 내 모습에 오늘도 스스로 놀랐다.
흘러나오는 노래 가사를 따라 흥얼거리다가 문득 눈시울이 붉어졌다. 아무도 보는 이 없는 방 안이었는데도, 왠지 부끄럽고 창피한 마음이 스쳤다.
그러나 동시에 그 순간만큼은 감정을 숨기고 싶지 않았다.
억지로 눌러두기보다 있는 그대로 흘려보내는 것이 지금의 나를 지켜주는 일임을 알았다. 어쩌면 눈물이란 슬픔만이 아니라 다시 살아가겠다는 다짐이기도 하다.
오늘의 빗소리와 노래, 그리고 불현듯 찾아온 감정은 분명 나를 더 단단하게 만들 것이다.
서툴고 흔들려도 괜찮다. 나는 여전히 배우는 중이고, 그 사실이 내일을 향한 가장 확실한 희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