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08.흐르는 땀 속에서 나와의
작은 약속을 지켰다

편도암으로 인한 항암과 방사선 치료 후 퇴원 19일차의 기록

by 마부자


비록 한 시간 단위로 잠을 깨지만, 얼마 전부터는 그 한 시간 동안 내가 분명히 잠이 들었다는 것을 느낀다.

깨고 나면 꿈을 꾼 기억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 짧은 시간 안에도 꿈을 꾼다는 것은 내 몸이 최소한 잠의 문턱 안으로 들어갔다는 증거다.

꿈조차 꾸지 못했던 지난날에는 눈을 멀뚱멀뚱 뜬 채로 한 시간을 버텨야 했으니 이 변화는 분명 작은 희망이다.

방사선 치료가 끝난 뒤 의사는 내게 말했다. 침샘이 손상되어 당분간 끈적이는 침이 나올 것이고 시간이 지나면 반대로 침이 잘 나오지 않아 입이 마를 것이라고.

실제로 요즘 나는 구내염의 고통은 덜했지만 입안은 인위적으로 침을 만들어내지 않으면 금세 메말라 버린다. 그 건조함 때문에 깊은 잠은 여전히 멀리 있다.

밤을 꼬박 새우는 일은 줄었지만 여전히 몸은 몇 차례 일어나야 했다. 결국 새벽녘, 어둠이 아직 방 안에 남아 있는 시간에 나는 습관처럼 서재로 향했다.

책상 위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았다. 새벽은 늘 같지 않다. 오늘의 새벽은 어제와 다른 빛을 품고 있었고 나는 그 속에서 또 하루를 버틸 힘을 찾고 있었다.

두 사람이 주말을 쉬고 재촉하듯 현관문을 나섰다. 가벼운 눈인사 하나로 아침 인사를 대신하고, 닫히는 현관문이 남긴 정적 속에서 나는 간단히 아침을 마쳤다. 그리고 늘 그렇듯 서재로 향했다.

지난 주말부터 새로 펼쳐 든 책은 양귀자의 장편소설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이었다.

생각보다 두꺼운 책이었기에 시간을 두고 천천히 읽을 셈이었지만 첫 장을 넘긴 순간 손이 멈추지 않았다. 결국 이틀 만에 끝까지 다 읽어버렸다.

1992년에 쓰여졌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그 안에는 지금의 우리를 날카롭게 찌르는 통찰이 담겨 있었다.

나는 양귀자를 <모순>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 주인공 안진진의 당당함, 그리고 사회가 정해놓은 고정관념을 깨뜨리며 자기 길을 걸어가는 모습에 한동안 넋을 잃었었다.

그 시절 나는 일기를 쓰면서조차 양귀자처럼 쓰고 싶어 했던 적이 있었다. 그녀의 문장은 현실을 똑바로 바라보면서도 결코 주눅 들지 않았다.

이 책의 주인공 강민주도 어쩌며 모순의 안진진과 비슷한 성향이지만, 전혀 다른 기질으 보인다. 또한 사회에 대한 주인공들의 대하는 자세도 전혀 다르다.

그리고 마지막 책장을 넘기며 난 뒤에도 마음 한편이 오래 울렸다. 아마도 나는 여전히 금지된 것을 향해 소망하는 인간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병을 마주한 지금은 그 소망이 더 단순해졌다. 살아남고 싶다, 다시 걸어가고 싶다, 여전히 글을 쓰고 싶다. 그것이면 족하다.

오랜만에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조차 잊게 만든 책을 만났다. 단순히 한 권의 소설을 끝냈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 몰입의 순간 속에서 내가 다시 살아 있다는 감각을 확인할 수 있었다.

오늘은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내 하루의 소중한 무언가를 이룬 듯한 기쁨이 마음에 차올랐다.

훌쩍 지나버린 오전, 마지막 책장을 덮고 곧바로 운동을 시작했다. 지난주보다 고작 5% 정도 강도를 높였을 뿐인데 몸은 이전보다 확실히 버텨주었다.

웨이트로 근육에 힘을 불어넣고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흐르는 땀 속에서 나 자신과의 작은 약속을 지켜냈다. 그것은 아직 멀쩡히 살아 있다는 증명서 같았다.

오후에는 남아 있는 체력을 모아 아주 간단히 집안 청소를 했다. 예전 같으면 대수롭지 않게 했을 일이 지금은 작은 성취처럼 다가왔다.

청소를 마치고 소파에 앉아 일부러 휴식 시간을 만들었다. 몸을 비워내듯 잠깐 눈을 붙였고 짧은 낮잠에서 깨어났을 때 창밖의 빛은 이미 또 다른 오후를 준비하고 있었다.

다시 서재로 돌아와 책의 서평을 작성을 했다. 이제는 제법 선선한 오후의 바람을 느끼며 걸어서 퇴근한 아내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왔다.

간단한 저녁 준비를 마친 후 식탁에 마주 앉아 아내는 “오늘은 조금 얼굴이 좋아 보인다”는 말을 건넸다.

사소한 한마디였지만 그것이 나에겐 나름 운동하며 땀을 흘린 보람이자 살아 있다는 증명이 되었다.

나는 웃으며 “책 한 권을 끝냈고 운동도 했으니 오늘은 잘 살아낸 하루”라고 웃으며 답했다. 아내도 빙긋 나를 따라 웃었다. 그렇게 웃음이 있는 저녁을 함께 했다.

창밖은 이미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고 하루의 마지막 시간이 조용히 흘러갔다.

특별하지도 화려하지도 않은 저녁이었지만 그 안에는 내가 원하던 삶의 조각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오늘은 그것으로 충분했다.

이전 07화09.07.오늘 만남의 살아있음을 알게해주는 선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