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도암으로 인한 항암과 방사선 치료 후 퇴원 23일차의 기록
가을비가 지나간 새벽 창문을 통해 스며든 바람은 초겨울의 기척처럼 차갑게 방 안으로 흘러들어왔다. 잠을 깨운 것은 그 바람이었지만 이상하게도 예전처럼 불면의 피로감은 덜했다.
언제 그렇게 힘들었냐는 듯 조금씩 회복되어가는 몸과 마음을 느끼며 여전히 어두운 새벽, 책 한 권을 펼쳤다.
늦잠이 필요했던 아내를 억지로 깨워 간단히 아침을 함께 했다. 오늘은 딸과 함께 오랜만에 대구로 나들이를 가기로 한 날이었다.
퇴원 후 처음으로 집 앞을 벗어나 외곽으로 나서는 길 그 사실만으로도 회복되어 일상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설레였다.
첫 일정은 대구 EXCO에서 열리는 캠페어였다. 한때 주 4회나 캠핑장에 다니며 자연 속에 머무르던 우리 부부는 내 발령과 이사로 인해 어느 순간 캠핑과 멀어졌다.
7년이 훌쩍 지났다. 그러나 투병의 시간을 지나 집으로 돌아와 다시 세 번의 주말을 보내며, 앞으로 부부가 함께 이어갈 무언가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깊어졌다.
아직은 체력도 부족해 볼링 같은 스포츠는 엄두가 나지 않았고, 그래서 다시 캠핑을 떠올렸다.
젊을 때처럼 몇 시간씩 텐트를 치는 건 무리지만 캠핑카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그것은 오래전 아내의 로망이기도 했다.
그 기대를 품고 행사장에 들어섰지만 막상 눈앞에 펼쳐진 건 텐트와 용품들이 대부분이었다. 우리가 꿈꾸던 레저차량은 단 세 대, 그것도 성에 차지 않았다.
입장료 삼만 원을 내고 고작 20분만에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정확히 확인하지 않고 장소를 추천한 내 탓이 컸다. 아내와 딸이 아쉬움을 감추며 “이대로 집에 갈 순 없다”고 말했을 때, 나는 오늘 하루를 다시 시작해야 했다.
다행히 딸이 칠곡 근처의 전망 좋은 카페를 찾아냈다. 언덕 위에 자리한 그곳에 도착하니 팔공산 자락이 한눈에 들어왔다.
따뜻한 커피와 달달한 케이크는 아직 미각이 돌아오지 않은 내게도 묘하게 위로가 되었다. 맛이 느껴지지 않아도 달콤해야 한다는 기억만으로도 충분히 달콤하게 다가왔다.
이동할 때만 해도 쾌청하던 하늘은 카페에 들어서자 거짓말처럼 빗줄기를 쏟아냈다.
유리창 너머로 끝없이 이어지는 빗방울 늦가을의 풍경 속에서 아내와 딸의 웃음소리가 겹쳐졌다.
그 순간, 아쉬움으로 시작된 오늘 하루가 차츰 소중한 기억으로 변해가는 것을 느꼈다.케이크를 나누며 다음 일정을 상의하던 중 문득 제2석굴암이 떠올랐다. 아내도 딸도 아직 가본 적이 없다 했다.
흔쾌히 동의가 떨어지자 우리는 다시 길을 나섰다. 놀랍게도 좀 전까지 요란스레 내리던 빗줄기는 언제 그랬냐는 듯 그치고 하늘은 다시 환하게 열려 있었다.
차를 몰아 제2석굴암에 도착했을 때 비가 예보되어서 인지 오늘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고요한 풍경이 오히려 더 특별하게 느껴졌다.
비 예보와는 달리 날씨는 뒷목이 따가울 정도로 강한 햇살이 구름 사이로 쏟아져 내렸고 그것은 마치 오늘 하루 우리 가족만을 위한 환영 인사처럼 다가왔다.
주차장에서 약 300미터 정도 걸어 입구에 도착했다. 나는 천주교 신자이지만 오늘만큼은 마음을 다해 부처님께 소원을 빌었다.
아미타여래 삼존석굴 앞에 서서 손을 모으고 올해 수능을 치르는 막내의 이름을 적은 합격 기원 기도문을 남겼다.
기도문을 붙이는 순간 아버지로서 할 수 있는 일이란 결국 이렇게 두 손 모아 간절히 바라는 일뿐이라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숙연해졌다.
이어 비로전 앞에서 아내와 딸이 작은 공양미를 바쳤다. 그들의 손길 속에는 올 한 해를 버텨온 피로와 내색하지 못한 걱정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우리는 말없이 같은 소원을 빌었다. 탈 많았던 올해가 지나고 내년에는 제발 아무 탈 없이 서로 건강하기를. 작은 한 자루의 쌀알이지만 그 마음만으로도 충분히 풍요로운 기도가 되었다.
낯선 부처님과의 만남 그리고 첫 공양이라는 작은 행사를 마치고 내려오는 발걸음은 아침에 집을 나설 때와는 달랐다. 단순한 나들이 이상의 의미가 덧입혀져 있었다.
병으로 잠시 멈추었던 시간들이 오늘만큼은 다시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우리는 가벼운 대화를 나눴다. 딸은 오늘 본 풍경 이야기를 했고, 아내는 아직 마음에 남은 기도를 이야기했다.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두 사람의 목소리를 오래도록 듣고 싶었다. 다시 예전처럼 가족과 함께 길 위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했다.
집에 도착하니 저녁이 저물어가고 있었다. 집 앞의 식당가에서 간단히 외식을 했다. 나는 여전히 맛을 완전히 느낄 수는 없었지만 그 식탁 위에는 분명 달콤한 온기가 있었다.
투병 이후 처음으로 “오늘 하루가 즐거웠다”라는 마음을 진심으로 품을 수 있었다.
긴 하루를 마무리하며 창밖을 바라봤다. 낮 동안 쏟아지던 비는 이미 그쳐 있었고, 고요한 밤의 공기가 창문 사이로 스며들었다.
오늘 하루는 완벽하지 않았다. 박람회에서는 실망했고, 뜻하지 않은 비에 계획이 어긋나기도 했다. 그러나 그 불완전함 속에서 오히려 오래 남을 순간들이 피어났다.
앞으로의 날들도 오늘처럼 완벽하게 계획을 하지 않아도 가족과 함께 웃고 함께 기도하며 함께 살아가는 그 순간만 놓치지 않는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렇게 퇴원 후 스물세 번째 날은 다시 삶을 살아갈 힘이 되어 내 안에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