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도암으로 인한 항암과 방사선 치료 후 퇴원 28일차의 기록
오랜만에 장거리 운전을 하고 돌아온 날이었다. 익숙하지 않은 길을 지나며 어머니와 함께한 시간을 곱씹었지만 끝내 마음속 깊은 말을 전하지 못했다.
말하고 싶으면서도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는 감정들은 늘 그렇듯 침묵 속에 머물렀고 그 침묵이 돌아오는 길 내내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다.
낯선 도시의 대중교통을 오가며 보낸 하루는 그 자체로 피로였고 집에 도착하자마자 쓰러지듯 잠자리에 눕게 되었다.
간간히 깨어나는 순간들은 있었지만 모처럼 긴 시간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새벽녘 천천히 눈을 뜨고 기지개를 켰을 때 느낀 건 상쾌함보다는 안도였다.
나는 아직 이렇게 깊이 잘 수 있구나 하는 단순한 사실이 위로로 다가왔다.
창문을 열자 초가을의 서늘한 바람이 방 안 가득 스며들었다. 그 바람이 마치 내 안의 오래된 응어리를 조금씩 풀어주는 듯했다.
짧은 명상을 마치고 서재에 앉아 책을 펼쳐 들었다. 그리고 오늘은 ‘정체성’이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병을 마주하며 삶은 단숨에 무너져 내리는 듯했지만 그 무너짐 속에서도 여전히 내가 나자신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다만 예전의 내가 당연하게 여겼던 정체성은 이제 다른 결을 띠기 시작했다. 사회에서의 역할이나 직업이 아닌 지금 이 자리에서 살아내고 있는 나 자신.
병은 많은 것을 가져갔지만 동시에 무엇이 나를 나 답게 만드는지 묻게 했다. 오늘 내가 붙잡은 ‘정체성’이라는 단어는 그렇게 다시 살아갈 힘으로 변해 나를 움직이게 했다.
아직은 내가 체력이 많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오늘 아침 절실히 알 수 있었다.
예전 같으면 봉화에서 울진, 다시 안동과 구미를 거쳐 대구로 내려오는 500km에 육박하는 거리를 하루에 달리고도, 다음 날 아무렇지 않게 일상을 이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어제의 운전과 낯선 도시의 대중교통을 이용한 여정은 오늘 오전까지도 내 몸에 잔상을 남겼다.
충분히 깊은 잠을 잤음에도 불구하고 긴장이 풀린 탓인지 아니면 떨어진 면역력 때문인지 오전 내내 소파에서 힘없이 몸을 눕힌 채 시간을 흘려보냈다.
말 그대로 병든 닭처럼 축 늘어진 모습이었다. 거울 속 힘 빠진 내 얼굴을 바라보며 문득 자괴감이 밀려왔다.
이렇게까지 약해진 몸으로 내가 앞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이었다.
그러나 곧 고개를 흔들었다. 병원에서 퇴원한 지 아직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은 시간.
아무리 강철 같은 체력을 가졌던 사람이라도 암 치료를 마친 뒤 한 달 만에 완벽하게 회복되길 바라는 것은 터무니없는 욕심일 것이다.
그것은 욕심을 넘어선 과욕이고 과욕은 늘 화를 불러온다. 이제야 조금은 알겠다. 내 몸은 나를 배신한 것이 아니라 단지 천천히 회복의 길을 걷고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오늘 느낀 무력감조차도 어쩌면 쉬어야 한다는 신호일 것이다. 욕심을 버리고 속도를 늦추는 것, 그 것 이야말로 지금의 내가 지켜야 할 삶의 리듬이다.
그렇게 오늘 하루는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은 하루였다. 아무 일도 없었던 하루가 아니었다.
한 페이지의 독서, 간단한 운동 그리고 점심과 저녁을 위한 음식 준비조차 하지 않은 온전한 쉼표를 자신에게 허락한 하루였다.
하루를 마무리하며 돌이켜보니 내 삶에서 이렇게 인위적으로 쉼표를 찍어준 날이 언제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불행과 안타까움이 겹치며 내린 결론은 그런 날이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늘 쉬는 순간에도 무언가를 해야만 한다는 강박 속에 나 자신을 몰아넣으며 살아왔다. 오늘은 그 강박을 내려놓는 연습을 했다. 쉬는 일에도 연습이 필요하다는 걸 이제 조금 알겠다.
쉬는 법을 잊어버린 사람처럼 나도 다시 배워야 한다. 천천히 조심스럽게 몸이 회복되도록 귀를 기울이고 마음이 숨 쉴 수 있게 틈을 만들어 주기로 했다.
오전에 나를 사로잡았던 단어인 ‘정체성’은 대단한 성취와 직함으로만 완성되는 게 아니라는 생각을 다시 한번 하게 된다.
지금 이 자리에서 나를 지탱하는 작은 습관들 가족을 향한 마음,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쉼표들까지. 그 모든 것이 모여 나를 이루고 있다.
오늘의 쉼표를 다음의 출발로 삼아야 겠다. 속도를 내는 날은 다시 올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속도를 줄여도 괜찮다. 천천히 걷되 멈추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가끔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쉼이 있어야 나아갈 수 있는 힘도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