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도암으로 인한 항암과 방사선 치료 후 퇴원 31일차의 기록
아침에 눈을 뜨게 한 것은 초가을의 쌀쌀한 공기였다. 창가를 열자 아파트 빌딩숲 사이로 스며드는 낯선 바람이 몸을 스쳤다.
그 바람 속에는 여름의 흔적이 사라지고 이제 계절이 완전히 달라졌음을 알려주는 냉기가 섞여 있었다. 잠시 거실 창가에 서서 바람을 깊게 들이마시며 짧은 명상을 했다.
닫힌 눈 뒤로는 여전히 치료의 그림자가 어른거렸지만 그럼에도 다시 하루를 시작할 수 있다는 사실이 고마웠다. 명상을 마친 뒤 서재로 돌아와 책상 앞에 앉았다.
오늘은 역사에 관한 책을 통해 머릿속에 떠오르는 단어가 있었다. 중요하지만 간과하고 있었던 단어 ‘자만’이었다. 병 앞에서 한순간이라도 방심하면 얼마나 쉽게 무너질 수 있는지를 지난 몇 달간의 시간들이 내게 가르쳐주었다.
나는 그 생각을 놓치지 않기 위해 펜을 들어 짧은 글로 정리했다. 어쩌면 그것은 나 자신에게 보내는 경고이자 다짐이었을지 모른다.
그렇게 ‘자만’에 대한 사유로 하루의 첫 페이지를 열었다.
오늘도 집 안에서 특별한 일 없이 하루가 흘러갔다. 아침에는 짧은 독서를 했고, 간단한 운동을 마친 뒤 짧은 낮잠에 몸을 맡겼다.
그렇게 나른한 오후를 보내고 있을 즈음, 얼마전 홈쇼핑에 예약을 해둔 보험 설계사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작년 아내의 갑작스러운 뇌출혈과 올해 나의 암 진단. 그 두 사건은 우리 가족의 삶을 뒤흔들었을 뿐 아니라 보험이라는 단어의 무게를 새삼 깨닫게 했다.
이전의 나였다면 아직 젊은데 무슨 보험을 들어, 천천히 해도 돼 라고 아이들에게 말했을 것이다. 또한 만약 가입을 하게 되더라도 약관을 제대로 읽어보지도 않고 그저 서명만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달라졌다.
아내의 병상에서 그리고 내 투병의 과정에서 치료비와 보장의 현실을 직접 경험했기에 설계사의 설명이 낯설지 않았다. 그 언어들이 내 삶에 닿아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실비보험을 하나씩 가지고 있지만 암, 뇌질환, 심장질환을 한 번에 보장해주는 보험은 없었다.
홈쇼핑에서 반복해서 보던 광고 중 마음에 드는 광고를 발견했고 꼼꼼히 보고 일단 전화 예약을 했던 것이다.
오늘 통화를 통해 최종 가입을 결정했고 미리 두 아이에게 이야기를 해두었기에 아이들도 주저하지 않았다.
1회차 납입 보험료는 부모인 우리가 부담하고 그 다음부터는 스스로 납입하도록 했다. 계약을 완료하고 문득 생각이 들었다.
10만원도 되지 않는 보험료를 30년간 대신 내줄 수 있는 능력이 없는 현실에 내심 작은 자괴감도 없지 않다.
그러나 곧 생각을 고쳐먹었다.
부모의 역할은 모든 것을 완벽하게 채워주는 데 있지 않다. 다만 아이들이 자신의 삶을 지켜낼 최소한의 토대를 마련해주는 것. 그 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할 일을 했다고 믿고 싶다.
오늘의 계약은 어쩌면 거창한 일이 아닐지 모른다. 그러나 혹시 모를 미래 앞에서 우리가 해줄 수 있는 작은 대비책이자 아이들에게 건네는 보이지 않는 보호막이다.
아내와 나는 건강을 과신하며 살아왔지만 이번 일을 통해 건강이 언제든 무너질 수 있음을 그리고 삶을 지탱해주는 장치들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배웠다.
저녁 무렵 하루를 되돌아보니 오늘은 크게 특별한 사건이 없는 날 같았지만 마음은 한층 단단해진 하루였다.
아침의 역사 책속에서 내게 ‘자만하지 말라’는 경고를 주었다면 오후의 보험 계약은 부모로서 아이들에게 작은 울타리를 세워주는 또 다른 다짐이 되어주었다.
나는 여전히 회복의 길 위에 서 있다. 아직 완치라는 단어는 멀리 있지만 방심하지 않고 매일을 살아낸다면 그 끝에 분명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 내가 배운 것은 건강도 삶도, 늘 준비하는 자의 몫이라는 사실이다.
이제 남은 시간은 다시 내 몸을 돌보는 데 쓰고 싶다. 그리고 언젠가 아이들이 오늘의 선택을 기억하며 부모가 남겨둔 이 작은 대비 속에서 마음의 안정을 얻기를 바란다.
오늘 하루는 그렇게 지나갔다. 평범했지만 결코 헛되지 않았던 하루. 나는 내일도 다시 자만하지 않고 성실히 살아가기로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