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25.실존과 불안,
서로 다른 방향으로 날 끌었다

편도암으로 인한 항암과 방사선 치료 후 퇴원 34일차의 기록

by 마부자

가을비가 제법 굵게 내려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평소보다 더 어두워진 새벽 창가는 빗줄기에 씻긴 듯 스산했고 그 차가움이 내 몸을 조용히 감싸 안았다.


짧은 명상을 마치고 책상에 앉아 역사 속 이야기들을 펼쳐놓으니 어제 머릿속을 맴돌던 ‘실존’이라는 말이 다시 내게 말을 걸어왔다.


현관을 나서는 두 사람과 짧게 인사를 나누고 늘 그렇듯 간단한 아침을 먹는다. 과일주스 한 잔, 통밀빵, 계란 두개의 단순함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오전의 두 시간은 독서로 채우고 11시가 되면 짧은 웨이트와 실내 자전거를 섞어 한 시간만큼 몸을 움직인다. 운동은 여전히 무겁고 숨이 가쁘지만 그 한 시간의 땀방울이 내게는 내일을 위한 작은 보증서처럼 느껴진다.


점심을 먹고 이틀에 한 번 청소와 빨래를 한다. 낮잠 또한 필수 루틴이 되어 버렸다. 낮잠에서 깨면 다시 책상에 앉아 글을 쓰고 해가 기울면 아내가 돌아온다.


우리는 함께 저녁을 먹는다. 대화는 짧고 잔잔하다. 각자의 시간을 존중하며 하루를 마무리하는 소소하지만 단단한 반복이다.


요즘 느닷없이 밀려드는 감정에 나 스스로 혼란스러운 순간을 맞을 때를 자주 맞는다. 투병 이전에도 비슷한 일상을 살았지만 언제까지 견뎌야 할까 하는 질문이 찾아온다.


매일 아침 같은 메뉴와 매끼 소금기 적은 반찬들, 같은 루틴의 반복이다. 물론 몸이 먹을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감사하지만 때때로 밀려오는 자괴감은 예상보다 더 날카롭다.


“정상”과 “비정상” 사이의 미세한 경계에서 내가 얼마나 취약한지를 알아차리는 순간들이 있다.


그 순간들은 견딜 만큼의 멘탈을 요구하고 나는 아직 그 요구를 완전히 채우지 못한 듯하다. 그래도 부정적인 감정만으로 하루를 채우지 않으려 노력한다.


빗소리를 들으며 생각했다. 이 루틴들이 나를 억지로 잡아두는 족쇄가 아니라 나를 다시 세우는 반복된 약속이라는 것을.


매일 같은 식탁, 같은 운동과 같은 책상에 앉아 책장을 넘기는 하루들이 결국은 내 삶의 가장 조용한 동맹이 되고 있음을 천천히 배운다.


작은 일상 하나하나가 쌓여 나를 지탱하는 '실존'의 증거가 된다. 오늘은 자괴감이 올라올 때마다 그 감정을 한 발 떨어져 바라보려고 했다.


감정에게 이름을 붙이고 그 다음에는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작은 일 하나를 해낸다. 창문을 잠시 열어 공기를 바꾸고, 짧게 몸을 풀어 스트레칭을 하다 보면 자괴감과 짜증이 뒤섞인 부정적인 마음도 빗물처럼 흘러내린다.


도심의 먼지와 공해, 그리고 마음의 혼탁함으로 뿌옇게 가려져 있던 하늘에 비가 내리고 나면 어느새 투명한 빛을 되찾듯 내게도 작은 행동들이 무지개 같은 빛을 만들어낸다.


오늘은 며칠 마음속을 짓누르던 흐림 대신 단비가 내린 하루로 기억하고 싶다. 비가 그친 뒤 저 산 아래에 일곱 빛깔 무지개가 살짝 걸리듯 내 안에 작은 무지개가 남았다.


며칠 전부터 붙잡고 읽어내려가던 한 권의 책을 드디어 덮었다. 알랭 드 보통의 <불안>. 철학에세이라는 다소 낯선 장르였지만 내게는 충분히 친절한 길잡이였다.


불안이 어디에서 오는지 그 근원을 하나하나 짚어주는 그의 문장은 내 흔들리는 마음을 이해받는 듯한 위안으로 다가왔다.


해법은 다소 어렵고 철학적이어서 가끔은 따라가기 벅찼지만 적어도 내가 느끼는 이 불안이 결코 나만의 것이 아님을 알게 된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되었다.


책장을 덮는 순간,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쳤다. 불안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루는 것이다. 나를 잠식하게 내버려 두는 대신 오늘처럼 작은 행동 하나로 길들이는 것이다.


내 창문을 열어 바람을 바꾸듯 불안 역시 그렇게 조금씩 환기시키며 살아내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을 내 마음에 무지개가 걸린 날로 기억하려 한다. 비록 잠시뿐일지라도, 그 빛은 다시 나를 걸어가게 하는 이정표가 되어줄 테니까.


‘실존과 불안’이라는 두 단어는 오늘 하루 내 안에서 서로 다른 방향으로 나를 끌어당겼다. 실존은 지금 이 순간 내가 살아 있음을 확인하게 했지만, 불안은 그 순간조차도 흔들리게 만들었다.


마치 비바람 속에서도 꺼지지 않으려 애쓰는 작은 촛불처럼 나는 존재와 두려움 사이에서 끊임없이 흔들리며 하루를 보냈다.


그러나 결국 이 혼란조차도 내가 여전히 살아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오늘 나는 그 불안과 실존의 경계 위에서 조심스럽게 하루를 마무리한다.

이전 24화09.24.바닥난 체력은 나를 무기력하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