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비가 그치고 새벽 창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이제 초겨울이 느껴질 정도로 차갑게 다가왔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연일 기승을 부리던 폭염이 대지를 지배하고 있었다.
아침저녁으로 조금씩 서늘한 바람이 불어올 때는 이제는 여름이 끝나고 가을이 시작되려나 싶었지만 계절의 변화는 늘 내 예상을 앞질러 달려간다.
짧았던 가을의 훈풍은 이미 사라지고 차가운 기운을 머금은 바람이 창가를 스치며 내 어깨를 움츠리게 한다.
계절이란 늘 흐르고 바뀌는 것이지만 이렇게 갑작스럽게 달라진 공기의 온도는 내 삶의 변화를 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되곤 한다.
이번 한 주는 역사에 대한 생각으로 하루를 열어보기로 했다. 개인의 투병의 역사, 한 가정의 기억 속 작은 역사, 그리고 이 나라가 걸어온 거대한 역사.
역사는 누군가가 기록하지 않으면 금세 잊히지만 동시에 기록만으로 다 담을 수도 없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름조차 남기지 않고 자신의 몫을 감당했던 분들의 삶을 떠올리면 단지 3일간의 글로 모든 것을 말하려 하면 안된다는 것을 안다.
그렇기에 오늘은 보다 경건한 마음으로 그들의 마음에 조금이라도 다가가고자 조심스럽게 이 단어를 붙잡아 본다. 오늘 새벽 내 마음에 들어온 문장은 바로 이것이었다.
여성 독립운동가의 외침 속에 담긴 절절한 호소. 나는 그 문장 속에서 ‘의무’라는 단어를 꺼내어 생각했다.
“이제 간절히
우리의 부모와 가장이 되시는 이들에게 바라는 바,
여러분의 딸들이나 아내들이
나라를 돕겠다고 돈을 좀 청구할 때에
머리를 흔들어 거절하거나 성을 내지 마소서,
대한은 남자 여러분의 대한만 아니요,
우리 여자들의 대한도 되나니
여러분의 아내나 딸들로 하여금
책임을 다하게 하소서,
의무를 가근히 하게 하소서.”
뭉우리돌의 바다
<1920년 신한민보에 실린 대한여자애국단 한성신의 글 중에서> 313page
의무.
의무란 반드시 해야 하는 어떤 것을 뜻한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법이나 규율로 정해져 있는 명령이 아니다.
누군가에게는 강요된 굴레일 수도 있고 또 다른 이에게는 스스로 택한 신념일 수도 있다. 그래서 의무라는 단어는 늘 그 무게를 감당하는 개인의 마음과 상황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역사 속 의무는 나라를 지키기 위한 목숨의 무게였지만 오늘의 나에게 의무는 병 앞에서 살아내기 위한 작은 선택의 무게다.
투병의 시간을 지나며 의무가 얼마나 다양한 얼굴을 하고 있는지를 새삼 깨닫는다. 치료의 고통을 견디는 것도 의무이고 하루하루 주어진 운동 루틴을 지켜내는 것도 의무다.
또 가족 앞에서 흔들리지 않으려 애쓰는 것, 그들의 걱정을 덜어주기 위해 밝은 표정을 짓는 것 역시 나의 의무다. 이 의무들은 누가 나에게 강요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살아야 한다는 의지와 가족을 지켜야 한다는 다짐이 나를 이끌어 가며 만들어낸 책임이다. 때로는 너무 무겁게 다가와 숨이 막힐 때도 있다. 하지만 동시에 이 의무가 나를 다시 일어서게 하는 힘이 되기도 한다.
역사 속 의무를 떠올리면 마음이 숙연해진다. 나라를 위해, 미래 세대를 위해 모든 것을 바쳤던 분들의 의무는 단순히 개인의 선택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를 살리는 사명이었다.
그 사명은 결국 오늘의 나에게까지 이어져 내가 숨 쉬고 글을 쓰는 이 순간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지금의 나는 어떤 의무를 다해야 하는가.
그것은 병을 이겨내는 일이며, 살아남아 다시 일상의 기쁨을 가족과 나누는 일일 것이다. 의무를 생각할수록 마음 한구석이 무거워지지만 동시에 나는 깨닫는다. 의무는 짐이 아니라 방향이라는 사실을.
그것은 나를 짓누르려는 무게가 아니라 내가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이정표다. 나에게 주어진 의무를 피하지 않고 받아들일 때 비로소 나는 나 자신을 잃지 않고 삶을 이어갈 수 있다.
의무는 인간이 자유롭기 위해 스스로를 제한하는 방식일지도 모른다. 누구도 강제로 내 마음을 움직일 수 없지만 스스로 선택하여 지켜내는 의무는 나를 자유롭게 한다.
역설적으로 느껴지지만 의무를 다하는 순간 나는 타인의 기대가 아니라 내 스스로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확신을 얻는다.
심리적으로 보아도 의무는 불안을 줄이는 힘이다. 불확실한 미래 앞에서 우리는 쉽게 흔들리지만 오늘 해야 할 의무를 정해놓고 실천할 때 마음은 한결 안정된다.
내가 해야 할 일이 분명하다면 내일의 불안은 조금은 덜어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나는 아픈 몸을 이끌고라도 매일 일정한 루틴을 지키려 한다.
그것이 나의 불안을 잠재우는 최소한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의무는 결코 거창하지 않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내놓았던 역사 속 의무가 있는가 하면 가족의 밥상을 지키는 평범한 의무도 있다.
오늘 나에게 주어진 의무는 한 시간의 운동, 한 줄의 기록, 한 끼의 식사를 지켜내는 일이다. 그러나 이 작은 의무들이 쌓여 결국 내 삶의 기반을 이룬다.
나는 오늘 ‘의무’라는 단어에 대해 그런 생각을 했다.
의무는 지켜야 할 무게의 짐이 아니라, 내가 살아야 할 삶의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