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2.사소한 기록들이
내삶을 지탱하는 힘이 된다.

편도암으로 인한 항암과 방사선 치료 후 퇴원 41일차의 기록

by 마부자

새벽 어스름이 거실 창을 스쳤다. 가을로 접어드는 공기는 어제보다 한결 차갑게 느껴졌고 짧은 명상을 마친 후 서재에 앉아 오늘 하루를 시작했다.


요즘은 아침마다 몸과 마음의 균형을 다시 맞추는 것이 하나의 의식처럼 되어버렸다. 마치 내가 여전히 살아 있고 회복의 길 위에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확인하는 과정 같다.


간단한 아침을 먹고 늘 그렇듯 체중계에 올라선 순간, 눈앞에 숫자가 분명히 변해 있었다. 퇴원했을 때보다 5kg 늘어난 몸무게. 두 달 만에 찾아온 변화였다.


물론 투병이전의 몸무게로 돌아가려면 한참 더 체중이 늘어야 한다. 그러나 한때는 줄어드는 몸무게가 두려움의 징표처럼 다가왔었다.


이제는 늘어난 체중이 오히려 내 삶이 조금씩 되돌아오고 있다는 희망의 언어처럼 보였다. 늘어난 숫자는 단순히 몸의 무게가 아니라 삶의 무게가 늘어나는 느낌이었다.


오전 독서를 마치고, 실내 자전거 대신 동네 산책로로 발걸음을 옮겼다. 예전 같으면 연꽃 단지를 돌아 대구의 끝자락까지 이어지는 긴 길을 걷고 뛰며 땀을 흘렸을 것이다.


오늘은 그저 가까운 길을 한 바퀴 도는 것만으로도 숨이 차고 다리에 힘이 풀리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러나 다시 걷고 있다는 것, 여전히 나아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회복의 조짐을 본다. 작은 움직임이 쌓여 언젠가는 긴 길을 다시 걸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생겼다.


운동을 마치고 점심에는 오랜만에 작은 용기를 냈다. 그동안 피하던 매운 음식을 다시 시도해본 것이다. 퇴원이후 매일 양념이 전혀 되지 않은 반찬을 먹다보니 가끔 얼큰한 또는 매운 음식이 너무 생각나기도 한다.


그럴 경우를 대비해 아내가 김치를 씻어두긴 했지만 오늘은 왠지 빨간 김치가 생각이 났다. 그냥 먹을 용기는 내지 못하고 김치를 조금 볶아 곁들여 먹기로 했다.


목의 껄끄러움을 덜기 위해 생두부 한모와 삶은 양배추 한덩이까지 준비를 했다. 야심차게 준비하고 나름 올리브유에 김치를 조금 볶아 두부와 함께 한입 베어 물었다.


그러나 생각보다 목이 버텨주지 못했다. 최대한 고춧가루를 빼고 김치만 볶았음에도 아직 내게는 조금 무거운 벽처럼 느껴졌다. 목의 껄끄러움이 통증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결국 물 한컵을 벌컥 벌컥 들이키며 젓가락을 내려놓고 냉장고에 빨간 볶음 김치를 넣어두었다. 그리고 씻어낸 김치를 들기름에 볶아 두부와 함께 먹었다.


조금은 무모하면서도 조심스러운 선택이었지만, 그 안에서도 ‘다시 시도할 수 있다’는 마음이 살아있다는 것이 나를 위로했다. 언젠가 다시 매운맛을 자연스럽게 느낄 날을 희망하며.


이른 오후 막내가 시험을 마치고 집으로 일찍 들어왔다. 고3, 마지막 교내 시험을 치르고 돌아온 얼굴에는 묘하게 담담한 기운이 감돌았다.


시험 결과를 묻는 내게 막내는

“큰 의미 없는 시험이에요. 이제 중요한 건 수능 준비예요.”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모습을 보며 지난 몇 달간 내 병과 치료로 인해 마음 한켠에서 늘 미안했던 아버지의 부재를 홀로 감당하며 자기 길을 걸어온 막내가 대견하게 느껴졌다.


그래도 수시 원서를 넣을 때 내가 함께 고민하고 도와줄 수 있었다는 게 나름의 위안이었다. 아이도 그때의 아빠를 든든하게 여겼을 것이다.


막내와 입시에 대한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나름 스스로 준비도 많이 했고, 고민도 많이 했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리고 그런 막내의 대화속에서 난 ‘이제 정말 막내가 다 컸구나’라는 생각이 조용히 스며들었다.


이른 저녁, 긴 연휴를 하루 앞둔 아내의 퇴근은 그 어느때보다 발걸음이 가벼운 듯했다. 퇴근 전 먼저 전화를 해서는 오늘은 둘이 데이트 겸 외식을 하자고 했다.


그렇게 아내의 퇴근에 맞춰 집을 나섰고, 인근의 식당에서 함께 저녁을 먹었다. 나름 연휴 전야제를 즐기자는 아내의 말에 함께 하는 취미활동까지 오랜만에 하고 집으로 돌아와 하루를 정리했다.


오늘 하루는 겉으로 보면 특별할 것 없었다. 그러나 몸무게의 변화, 음식 앞에서의 작은 도전, 막내와의 대화, 그리고 짧은 산책과 아내와 짧은 데이트까지


이 모든 순간들이 하나로 이어져 나를 회복의 길 위에 세워두고 있었다. 사소한 기록들이 결국 내 삶을 지탱하는 힘이 된다.


마치 희미하게 이어지는 별빛이 모여 밤하늘을 환히 밝히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