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4.함께 하는 명절 연휴에
감사함이 남았다.

편도암으로 인한 항암과 방사선 치료 후 퇴원 43일차의 기록

by 마부자

아침 창문을 열자 맑은 햇살이 커튼 사이로 부드럽게 스며들었다. 긴 연휴의 둘째 날 아침이었다. 명절의 분주함이 사라진 도심은 평소보다 한결 조용했고 텅 빈 주차장을 내려다보는 거실의 공기마저 느슨하게 흘렀다.


치료 이후 새벽마다 깨던 불안한 잠이 조금씩 길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스스로도 낯설게 느껴졌다. 몸의 피로가 완전히 회복된 것은 아니지만, 숙면을 취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요즘 내게는 충분한 변화였다.


연휴라 그런지 아내의 얼굴에도 오랜만에 여유가 비쳤고 막내는 늦잠을 자며 방 안의 인기척을 감췄다. 특별한 일정이 없는 오전, 예전 같으면 친구들과 술자리를 잡거나 아내와 낮술을 즐겼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소파에 나란히 앉아 명절 특집 영화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시간을 흘려보냈다. 책을 펼쳤다가 이내 눈이 감기며 깊은 낮잠에 빠져들었다.


예전 같으면 게으름으로 느껴졌을 그런 시간이 이제는 ‘쉬어도 되는 이유’가 되었다. 짧은 꿀잠 후 눈을 뜨니 오후의 햇살이 거실 바닥을 비스듬히 비추고 있었다.


냉장고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아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늘 점심은 뭐 먹지? 명절인데 그냥 지나가긴 아쉽잖아.”


그런 아내를 보며 나는 웃으며 말을 건넸다.

“명절이 뭐 별거 있나? 그냥 함께 즐거운 마음으로 한끼 식사하면 되는 거 아닌가?”


그런 내 말에 아내가 편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럼 우리 냉장고에 있는 반찬들로 비빔밥 어때?”


전혀 마다할 필요가 없는 메뉴였다. 흔쾌히 동의를 했고 아내는 냉장고속에 들어있는 각종 나물과 반찬들을 양푼에 넣고 밥을 비볐다. 물론 나를 위해 고추장을 넣지 않은 간장을 살짝 넣은 비빔밥을 따로 준비를 해주었다.


예전 같으면 상을 가득 채워야 직성이 풀렸겠지만 지금의 우리에게는 그럴 이유가 없었다. 그저 세 식구가 함께 앉아 따뜻한 밥 한 끼를 나누는 것으로도 충분했다.


며칠된 반찬들과 밀키트로 주문한 갈비탕 국물로 차린 명절을 앞둔 우리 가족의 식탁이었지만 충분히 풍요로운 만찬이었다. 아직 완전히 돌아오지 않은 미각 덕분에 약간 짠맛이 느껴졌지만 그 안에서 ‘삶의 맛’을 느꼈다.


음식의 맛이 아니라 함께 식탁에 앉은 가족들이 그 자리를 채워주고 있었다. 평범한 식탁이지만 그 안에서 오래된 감사가 느껴졌다.


식사를 마친 뒤 아내가 말했다.

“소화도 시킬 겸 바람도 좋으니까 잠깐 나가볼까?” 그 말에 잠시 망설였지만 마음속에서는 ‘괜찮다’는 대답이 먼저 나왔다. 우리는 집 앞 골목길로 나섰다.


두 달 전 병원 복도를 걸을 때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그때는 생존을 위한 걸음이었고 오늘은 치유를 위한 걸음이었다. 비가 그친 초저녁, 바람을 맞으며 걷던 아내가 내 팔을 잡으며 말했다.

“이제 정말 가을이네. 벌써 밤공기가 차가워.”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도 이 바람은 병원 냄새보다 훨씬 좋네.” 짧은 대화였지만 그 안에는 지난 시간의 무게와 함께 이겨낸 나날의 흔적이 묻어 있었다.


가로등 불빛 아래로 낙엽이 흩날리고 골목 끝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가 이상하리만큼 따뜻하게 들렸다.

오랜만에 아내와 함께 걷는 길에서 우리는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을 알고 있었다.


아직 체력이 완전하지 않아 오래 걷지는 못했지만 그 짧은 산책만으로도 충분히 살아 있음이 느껴졌다.


몸의 회복은 숫자로 확인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다시 걸을 수 있다는 사실로 증명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아내가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명색이 추석인데 송편은 먹어야 하는 거 아니야?”

그 말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송편을 준비하지 못한 걸 떠올리고 우리는 길을 돌려 동네 떡집으로 향했다.


명절 연휴의 거리에는 가족 단위의 사람들로 북적였고 가로등과 네온사인이 뒤섞인 가을 저녁의 빛이 거리를 따뜻하게 감쌌다.


그 속을 걷는 사람들의 얼굴엔 여유와 웃음이 묻어 있었다. 병과 싸우는 시간 동안 잃은 것이 많았지만 오늘 하루만큼은 잃은 것보다 남아 있는 것들이 더 또렷하게 느껴졌다.


걷고 웃고 함께 밥을 먹는 평범한 일상. 그 평범함이야말로 지금 내게는 가장 크고 소중한 선물이었다. 오늘은 그렇게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연휴에 감사함이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