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0.단지 내가 그것을 바라볼
여유가 없었다.

편도암으로 인한 항암과 방사선 치료 후 퇴원 49일차의 기록

by 마부자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어젯밤은 연휴의 마지막 날이었지만, 아내는 회사의 강제휴무 덕분에 아직도 사흘의 여유가 남아 있다.


그렇다 해도 막내는 “오늘이야말로 진짜 마지막 밤”이라며 아내를 설득했고, 결국 셋이 함께 야식을 주문했다.


비록 봤던 영화지만 ‘파묘’를 보며 연기자들의 돋보이는 연기에 몰입을 하다 보니 시계는 자정을 훌쩍 넘겼다.


그 여파는 아침으로 이어졌다. 어스름한 새벽빛이 아닌 투명하고 강렬한 햇살이 커튼 사이로 쏟아질 때에서야 눈을 떴다.


벌써 3일째 새벽 루틴을 지키지 못한 셈이다. 예전 같았으면 자책이 앞섰겠지만 이제는 조금 다르게 생각하려 한다. 때로는 몸이 먼저 쉼을 명령할 때가 있다.


치료 이후의 몸은 그런 신호에 훨씬 솔직하고 그 목소리를 무시할 수 없다는 걸 알았다. 그러나 하루의 리듬을 어지럽히긴 했지만 창밖의 햇살을 맞으며 느릿하게 일어나는 아침 또한 나름의 회복의 시간이었다.



완벽하게 지켜내는 하루보다 가끔은 흐트러진 리듬 속에서 나를 다독이는 하루가 더 소중하게 느껴진다.


오늘의 느린 아침은 어쩌면 내 몸이 보내는 작은 감사의 신호일지도 모른다. 잘 회복 중이고, 또한 그것을 느낄 수 있으며, 함께 웃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이미 충분히 루틴 속에 있다.


어제와 그제 산책을 하며 느낀 것은 바람이 참 좋다는 것이었다. 조금만 걸어도 땀이 나던 여름이 지나고 이제는 걸을수록 몸과 마음이 동시에 가벼워지는 계절이 되었다는 것.


KakaoTalk_20251010_210521580_01.jpg?type=w1
KakaoTalk_20251010_210521580_02.jpg?type=w1
KakaoTalk_20251010_210521580.jpg?type=w1

그래서 당분간은 늘 하던 실내자전거를 잠시 넣어두고 자연의 공기를 온전히 마실 수 있는 산책로 걷기를 하기로 했다. 간단한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집을 나서자, 오늘도 어김없이 시원한 가을바람이 나를 맞이했다.


연휴 동안 북적이던 연꽃습지는 다시 고요를 되찾았고 나는 가장 먼 코스를 택해 잰 걸음을 옮겼다. 예전 같았으면 달리기와 빠른 걸음을 번갈아 하며 숨이 턱까지 차오를 정도로 몸을 몰아붙였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럴 수 없다. 치료 이후의 몸은 예전의 내 몸이 아니고 나는 이제 그 사실을 담담히 받아들인다. 한 달간 실내자전거로 단련해왔다고는 하지만 사용하는 근육과 호흡 그리고 움직임의 리듬은 전혀 달랐다.


그래서 오늘은 그저 조금 빠른 걸음으로 숨이 차오르기 직전까지만 나를 밀어붙였다. 나를 혹사시키지 않으면서도 조금씩 더 나아가게 만드는 속도로.


혼자 걷는 길에는 그만의 의미가 있다. 대화 대신 생각이 함께 걷고 누군가의 발소리 대신 내 호흡이 리듬을 만든다. 그렇게 걷다 보면 마음속의 잡음이 잦아들고, 어느새 발걸음이 나의 일상이 된다.


집에 도착할 즈음 워치에서 7km, 1만보를 달성했다는 알림이 울렸다. 그저 걷는 것도 버겁던 지난 시간을 떠올리면 지금의 나는 분명 다른 사람이다.


땀에 젖은 등줄기와 묵직한 숨결 속에서 다시 살아 있다는 감각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회복이란 단순히 몸이 나아지는 일이 아니라 이렇게 조금씩 예전의 나를 다시 만나러 가는 여정일지도 모른다.


운동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니 아내와 막내는 막 늦은 점심을 마친 뒤였다. 샤워를 마치고 어제 일기를 조금 늦게 정리한 후, 소파에 앉아 잠시 숨을 고르고 있었다.


그때 아내가 다가와 익살스럽게 볼링장에 가자고 조르기 시작했다. 주말이면 어차피 클럽 사람들과 약속이 잡

힐 텐데 내일 가자고 말했지만, 오늘 꼭 가야 한다며 재촉하는 아내의 표정은 평소와 달랐다.


그 이유는 도착하자마자 알 수 있었다. 추석 명절에 아이들에게 받은 용돈을 보태 새로 주문했던 볼링공이 완성되어 있었다.


초구용 볼 하나와 스페어용 하드볼 하나, 그리고 오래 쓰던 공의 복원까지. 볼링장 한쪽 벤치에 영롱한 빛을 뿜으며 가지런히 놓인 세 개의 볼 앞에서 아내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볼의 표면을 손끝으로 천천히 쓸어내리며 흐뭇해하는 아내의 모습을 보며 문득 생각했다. 행복은 언제나 멀리 있다고 믿어왔지만 사실은 늘 손끝 닿는 거리에 있었다.


그것은 누군가의 거창한 성공이나 특별한 사건 속에 숨어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 같은 평범한 하루의 틈새 속에 조용히 피어나는 것이었다.


아내가 새 공을 가지런히 놓고 사진을 찍으며 빙그레 웃는 순간 그동안 내가 잊고 있던 지금 여기의 의미가 선명하게 다가왔다.


SE-3ea0be8e-346d-4caf-8404-251c8f79057f.jpg?type=w1
SE-c701c45b-79f5-43e5-9865-e4a0d2a63ab7.jpg?type=w1

사실 치료를 마치고부터 나는 매일의 일상에서 새로운 의미를 찾으려 애썼다. 그런데 오늘 아내의 웃음 앞에서 비로소 그 답을 알았다.


행복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내 곁에 와 있었던 것이다. 단지 내가 그것을 바라볼 여유가 없었을 뿐.


그 순간, 나는 조용히 다짐했다. 내일도, 모레도, 아내의 웃음을 볼 수 있는 하루가 되기를. 그리고 그 웃음을 지켜줄 수 있는 건강과 평온이 내게 오래 머물러 주기를.


오늘 나는 그렇게 또 하나의 회복을 마음 깊은 곳에서 조용히 확인했다.





이전 09화10.09. 감정은 시간 앞에서 같은 속도로 흘러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