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4. 각자의 무대에서
이기고 지며 살아간다.

편도암으로 인한 항암과 방사선 치료 후 퇴원 53일차의 기록

by 마부자

새벽,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에 눈을 떴다. 마치 한여름 장마를 연상케 하는 굵은 빗방울이 창을 연달아 때리고 있었다.


시간을 확인하니 새벽 5시를 조금 넘긴 시각. 잠시 화장실에 다녀왔지만, 다시 잠들기엔 너무 어중간한 시간이었다. 결국 이불을 걷고 일어났다.


dark-1850684_1280.jpg?type=w1 사진 출처: 픽사베이

베란다 문을 열자 차가운 공기와 함께 빗내음이 스며들었다. 거세게 떨어지는 빗줄기를 바라보며 잠시 명상을 했다. 그 몇 분의 고요가 마음을 맑게 씻어 주었다.


서재로 돌아와 책 한 권을 다시 펼쳤다. 잠의 소중함을 일깨워주었던 바로 그 책이었다. 잠 못 이룬 새벽에 그 책을 다시 펼치고 있다는 사실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오늘은 의존이라는 단어에 대한 글을 썼다. 최근 들어 내 삶이 누군가 혹은 무언가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의존은 나약함의 표식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이어주는 관계의 증거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글을 쓰며 깨달았다. 독서와 글쓰기가 삶에 도움이 된다는 말은 바로 이런 깨달음의 순간을 뜻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생각이 정리되고 나니 기분도 한결 가벼워졌다. 빗줄기가 세차게 내리는 아침이었지만 현관에서 아내와 막내에게 밝게 인사를 건넸다.


간단히 아침을 먹고 책상 앞에 앉아 이번엔 다소 낯선 책 한 권을 꺼내 들었다. 물리학에 관한 책이었다. 좋아하는 유시민작가가 추천한 책으로 과학자들도 어렵다고 하는 과학과 수학의 집합체인 물리학에 관한 책이었다.


어렵고 심오해 보였지만 이상하게 호기심이 생겼다. 지금의 나에게 필요한 건 아는 만큼의 이해보다 모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태도라는 생각이 들었다.


책꽂이에는 읽지 못한 책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읽을 책이 많다는 건 풍요로움이지만 동시에 묘한 압박이기도 하다. “혹시 돈이 많은 부자들도 이런 기분일까?” 문득 그런 우스운 생각이 스쳤다. 가진 것이 많아도 그 무게만큼의 부담이 함께할지도 모르겠다.


다행히 이 책은 물리학을 모르는 사람도 이해할 수 있도록 쉽게 쓰여 있었다. 낯선 공식들 사이로 이해의 기쁨이 조금 스며드는 순간 오랜만에 공부하는 사람의 마음이 되었다.


비는 여전히 그치지 않았다. 이번주 만보 걷기를 시작하려 했지만 날씨가 그 계획을 멈춰 세웠다. 잠시 고민했지만 대신 실내 자전거의 페달을 밟기 시작했다.


처음엔 버거웠던 강도가 이제는 익숙하다. 땀이 이마를 타고 흐르자 그 땀방울 속에서 회복되고 있음이 또렷하게 느껴졌다. 어느새 한 시간이 훌쩍 넘었다. 불과 한 달 전, 40분도 버거웠던 운동이 지금은 1시간 20분으로 늘었다.


숫자는 단순한 변화일지 몰라도 그 속에는 내 몸이 다시 균형을 찾아가는 과정이 담겨 있다. 병으로 인해 무너졌던 질서를 조금씩 되돌려놓는 일.


어쩌면 이것이 나의 또 다른 치료이자 의식일지도 모른다. 진짜 회복은 커다란 변화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하루의 작은 반복을 놓치지 않는 꾸준함 속에 숨어 있다는 걸 오늘 새삼 다시 생각해 본다.


비가 내리는 오후 그 꾸준함이 내 하루를 단단하게 채워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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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딸과 막내는 대구 야구장으로 향했다. 지난 9일 준플레이오프 예매에 실패했지만, 우천으로 경기가 하루씩 밀리면서 마침내 취소표를 구할 수 있었다.


일요일 경기가 취소된 덕분에 평일로 미뤄진 경기였고 그 우연이 두 아이에게는 소중한 기회가 되었다. 비가 내리는 날씨 속에서도 옷과 응원도구를 챙겨 들고 설레는 마음으로 출발했다.


압도적인 파란 물결로 뒤덮인 삼성라이온즈 팬들 사이에서 붉은 응원복을 입은 두 사람은 외로이 SSG의 수건과 응원복을 흔들었다.


그러나 그들의 열정적인 응원에도 불구하고 경기의 결과는 아쉽게도 패배였다. 결국 그 둘은 스스로를 패배요정이라 부르며 비 내리는 밤 젖은 신발과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이제 오늘이 그 마지막 관문이다. 오늘 지면 SSG의 시즌은 여기서 끝이 나고 이기면 플레이오프를 향해 대전으로 향하게 된다.


승패를 떠나 두 아이가 직접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느낀 그 열정의 시간만큼은 분명 오래 남을 것이다. 비 내리던 어제의 함성은 이미 지나갔지만 그들의 젊은 하루 속엔 여전히 뜨거운 불빛이 남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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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오늘도 그 열정의 응원은 이어질 것이다. 패배의 아쉬움을 껴안은 두 아이는 다시 붉은 옷을 챙겨 입고 오늘은 각자의 자리에서 TV앞에 앉을 것이다.


결과가 어찌 되든 응원하는 그 마음만은 어제보다 더 단단해졌을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 스포츠의 본질은 승패보다 함께하는 순간에 있다.


응원은 단순히 소리를 지르는 행위가 아니라 누군가의 가능성을 믿는 일이다. 서로 다른 색의 유니폼을 입고 각자의 자리를 지키지만 모두 같은 열정으로 그라운드를 바라본다.


경기의 결과가 바뀌지 않아도 마음의 방향은 그렇게 하나가 된다. 삶도 다르지 않다. 우리는 각자의 무대에서 수없이 이기고 지며 살아간다.


그러나 진짜 중요한 것은 승패가 아니라 그 시간을 함께 견디고 응원해주는 사람들이 곁에 있다는 사실이다.


그 순간이 쌓여 하루가 되고 그 하루들이 모여 삶이 되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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