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도암으로 인한 항암과 방사선 치료 후 퇴원 54일차의 기록
비가 그친 새벽의 공기가 어제보다 한층 차가웠다. 창문을 열자 싸늘한 바람이 서재 안으로 밀려들었고 그 바람이 남은 잠을 깨웠다. 스탠드 불빛 아래에서 책을 읽고 마음에 닿은 단어에 대한 생각을 정리했다.
오늘 아침의 주제는 ‘통제’였다. 인간의 욕심이 어디까지 왔는지, 진화를 거슬러 잠을 통제하려는 욕심을 넘어 꿈을 통해 기억을 통제하기까지 이르렀다.
삶에서 모든 것을 통제하려는 인간의 욕망이 어디까지 왔는지, 그리고 그 욕망을 통제하려 하면 할수록 오히려 마음이 불안해지는 아이러니는 만들고 있는 인간의 이야기를 읽으며 나도 모르게 깊은 한숨이 쉬어졌다.
그리고 잠시 치료 이후 내가 붙잡아왔던 불안의 근원을 천천히 들여다보았다. 결국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상황이 아니라 인식이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독서를 마친 뒤 블로그에 올라온 이웃들의 글을 읽었다. 누군가의 하루, 누군가의 문장 속에서 나의 지난 시간을 비춰보며 잠시 댓글을 남겼다.
얼굴도 모르는 이웃들의 글들 속에서 누군가는 가족의 이야기를 또 누군가는 일상 속 작은 기쁨을 담아 올리고 있었다. 내가 남긴 짧은 한 줄의 댓글이 누군가의 하루에도 작은 힘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오랜 친구에게 편지를 쓰듯 천천히 단어를 골랐다.
병이 내 몸을 찾아오고 세상과의 거리가 한동안 멀게만 느껴졌지만 이렇게 누군가의 글을 읽고 마음을 나누는 순간마다 다시 ‘연결’되고 있다는 실감을 얻는다.
이웃이란 이름으로 나누는 그들의 이야기속에 스며든 문장들이 이제는 내 하루의 균형을 잡아주는 듯했다.
오랜만에 하늘이 맑았다. 차가운 바람 속에서도 햇살은 따뜻하게 느껴졌고, 그 온도 차이가 오히려 계절의 변화를 또렷하게 보여주었다.
실내자전거를 뒤로하고 운동화를 신고 밖으로 나갔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폐 깊숙이 스며드는 공기가 차갑게 느껴졌다.
길가의 나무들은 찬 가을바람에 하나둘 잎이 떨어지고 있었다. 이미 바닥에 떨어져서 도로 한켠에 쌓이기 시작한 낙엽들을 보며 잠시 지나간 여름의 얼굴을 떠올렸다.
뜨거웠던 병원의 시간들, 치료실의 냄새, 병실 창문너머로 보이던 푸른 나무들까지. 그 모든 것들이 멀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낯설면서도 안도감으로 다가왔다.
이틀전에 걸었던 코스를 그대로 걸었지만, 다가오는 풍경은 많이 변해 있었다. 추수를 하던 논은 이제 밑둥만 가득했고, 초록 빛 감들도 조금 더 붉어져 있었다.
조깅이나 빠른 걸음이 아닌, 천천히 걷는 속도였는데도 몸에 열이 오르고 얼마 지나지 않아 땀이 옷에 베이기 시작한다.
차가운 바람과 따가운 햇살이 동시에 피부에 닿는 묘한 감각을 느끼는 순간을 만끽하다 보면 낯익은 길이 보이고 만보를 채웠다는 알람이 울린다.
오늘은 약8km를 걸었다. 걸음 수는 10,798보였다. 바람부는 가을 하늘 아래를 단지 걷기만 하고 돌아온 순간이었지만 나름의 성취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
예전에는 조깅하듯 뛰어서 다니던 코스였던 점을 생각하면 오늘의 만보는 초라한 수준이지만, 이제는 그런 부정적인 감정을 가지지 않는다.
다시 이 거리를, 이 산책로를, 이 운동화를 신고 걸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나는 행복하고 희망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샤워를 마치고 점심을 준비했다. 투병생활을 시작하고 체중이 이전보다 약 15kg이 감소했을 때만 해도 당장 내게 필요한 것은 체중 증가였다.
물론 당시에 구내염과 목의 통증 그리고 미각의 상실로 인해 아무것도 먹지 못했기 때문에 예정된 체중감소였다. 그리고 퇴원후 상실된 미각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음식을 입으로 넣으려 노력했다.
음식이 짠지, 단지, 쓴지도 모른채 단지 살기위해 먹었던 순간이 지나고 조금씩 미각이 돌아오기 시작하면서 약 석달간 먹지 못한 음식에 무슨 복수라도 하듯 한정된 음식들을 입속에 넣었더니 체중이 급격히 불기 시작했다.
투병이전에 평소 근력운동과 유산소 운동을 병행하면서 1일 1식을 하던 나였다. 그런데 요즘은 활동량도 거의 없는 상태에서 고단백의 식사를 약 두 달간 지속했더니 삼시세끼 다 챙겨 먹은 결과였다.
예상보다 갑작스러운 증가였다. 이대로 가다간 암이라는 병을 고치기 위해 비만으로 성인병에 걸릴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정도로 몸의 지표가 조금씩 나빠지기 시작했다.
물론 항암에 더 적극적인이고 철저한 식단관리 및 음식을 조절해서 먹으면 체중관리도 함께 할 수 있겠지만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선택이다.
체중 관리를 위해 이번 주부터 칼로리를 조절한 식단으로 점심을 준비하기로 했다. 아무리 건강식이라 해도 무작정 많이 먹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적절한 칼로리 조절을 하며 자주 조금씩 먹는 습관을 만들어야 했다. 물론 현미밥을 짓고 칼로리를 계산하며 직접 요리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지금은 그만한 여유가 없다.
그래서 조절된 도시락으로 먼저 시작해보기로 했다. 물론 삶은 양배추와 채소, 그리고 두부 반모와 함께.
어제부터 먹기 시작한 도시락은 포만감이 오래가지 않는다. 식사를 마치면 여전히 배가 허전하고 더 먹고 싶다는 유혹이 밀려오지만 그 마음을 꾹 눌렀다.
이 작은 절제가 내일의 나를 조금 더 건강하게 만들 것이라 믿으며 대신 오이 몇 조각과 사과 반쪽으로 점심을 마무리했다.
짧은 휴식 뒤, 어제 읽던 물리학 책을 다시 펼쳤다. 분자, 원자, 전하, 전자기, 양성자, 화학 반응 등 익숙한 듯 낯선 단어들이 페이지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학창 시절 배웠던 내용이라지만, 머릿속에는 남아 있는 게 거의 없었다. 한 문장씩 읽어 내려가며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잠시 스쳤다.
그러나 어렵게 쓰인 문장들 속에서도 묘한 매력이 있었다. 조금만 더 집중하니, 그 복잡한 개념들이 마치 살아 움직이듯 눈앞에 펼쳐졌다.
문장을 단순히 지식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상상의 감정을 더하니 물리학이 조금은 친근하게 다가왔다.
보이지 않는 세상의 질서와 움직임이 나름의 언어로 말을 걸어오는 듯했다.
오늘의 독서는 그렇게, 낯선 학문 속에서 또 다른 ‘상상의 재미’를 발견한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