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6.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듯한
감정의 아침이다.

편도암으로 인한 항암과 방사선 치료 후 퇴원 55일차의 기록

by 마부자


장맛비를 연상케 하는 굵은 빗줄기가 창을 세차게 때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평소보다 조금 늦게 몸을 일으켰다. 창문을 통해 바라본 아파트 사이 가로수의 풍경은 빗줄기에 떨어진 나뭇잎들로 인해 하루 전보다 훨씬 앙상해져 있었다.


투병 이후 아침에 눈을 뜨고 일어나 베란다에 서면 가장 먼저 몸의 이상 신호를 찾게 된다. 이제는 거의 습관처럼 되어버린 일이다.


사진출처: 픽사베이

어제는 괜찮았던 턱관절이 묘하게 당기고 뒷목은 어제보다 조금 더 뻐근해졌다.


입안의 건조함이 심해진 것 같고, 목 안쪽의 미세한 통증이 생겨났다.


얼마전까지 아프지 않던 오른쪽 뒤의 어깨의 통증도 다시 생겨난 것 같은....


이런 미세한 몸의 이상신호가 느껴지면 마음속 어딘가에서 단단히 붙들어두었던 신념이 미세하게 흔들리는 것이 느껴진다.


그 불안한 감정이 커다란 유리창에 비친 나의 표정으로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러나 지금 나는 최종 치료를 마친 지 아직 석 달도 채 되지 않았다. 이런 증상들은 어쩌면 회복의 과정 속에서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일일지도, 몸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신호일지도 모른다고 스스로에게 위로를 건넨다.


그리곤 억지로라도 미소를 지어본다. 매일 아침마다 커다란 창문에 비치는 나의 얼굴은 하늘과 땅,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듯한 묘한 감정을 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도 다시 하루를 시작한다는 사실만은 변함이 없다. 다시 흔들이는 신념을 다잡고 서재로 향한다.


잠의 중요성에 관한 책을 다시 펼쳐 들었고, 오늘 아침은 ‘이용’이라는 단어에 관한 글을 다듬으며 시작했다.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잠을 방해하던 인공의 불빛이 생겼지만 동시에 그 기술 덕분에 더 효율적으로 숙면을 취할 수 있는 방법도 생겨났다. 그 아이러니 속에서 나는 문득 생각했다.


지금은 우리가 기술을 이용하고 있지만, 언제까지 우리가 기술을 이용할 수 있을까. 결국 어느 시점이 다가오면 우리가 이용을 당하는 순간이 오지 않을까...


이후 그 생각은 인간관계로까지 번졌다. 기술과는 다르게 관계에서 누군가를 이용한다는 말은 부정적으로 들리지만 한편으론 삶을 유지하기 위해 누군가의 도움을 이용하는 일도 필요한 법이다.


이용하는 것과 이용당하는 것, 그 둘 중 어느 쪽이 더 나은가를 나는 단정할 수는 없었다. 어쩌면 이용의 본질은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한 순간을 주고받는 일일지도 모른다.


이용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생각보다 더 깊게 나를 고민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오늘의 글은 평소보다 오래 걸렸지만 오랜만에 스스로에게 깊이 남는 문장이 되었다.


few-3237665_1280.jpg?type=w1

운동시간이 되어 창밖을 보니 여전히 빗줄기는 멈출 기미가 없었다. 결국 실내자전거에 페달을 올리고 천천히 속도를 올렸다.


오후에는 어제 읽던 물리학 책을 다시 펼쳤다. 여전히 낯설고 어려운 문장들이었지만 그 속에서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는 듯한 호기심이 생겼다.


결국 물리학이란 머릿속의 상상을 얼마나 구체적인 질문으로 바꿀 수 있느냐의 학문일지도 모른다. 공상이 아닌 상상, 즉 현실을 향해 다가서는 인간의 지적 용기의 세계가 물리학의 정의가 아닐까.


이후 물리학이 모든 과학에 어떤 방식으로 영향을 주는지를 말하는 부분을 읽으며 시간이 흐르는 줄도 모르고 몰입해 있다가 아내의 퇴근 전화를 받고서야 책을 덮었다.


비가 잠시 잦아든 틈을 타 간단히 외식을 하고 돌아오는 길, 아내는 이번 주말 볼링장에서 있을 개인전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오랜만에 선수로 출전을 하는 아내는 새로 맞춘 공이 손에 잘 붙는다며 이번엔 꼭 좋은 결과를 내고 싶다고 했다. 그 말 속에는 오랜만에 느껴지는 열정이 담겨 있었다.


오늘 하루는 빗소리로 시작해 빗속에서 끝이 났다. 그리고 나는 글과 함께 아내는 현재 영월에서 개최된 프로볼링대회을 보며 각자의 세계에 몰입하며 하루를 보낸다.


사진출처: 픽사베이

삶이란 이렇게 서로 다른 집중 속에서도 나란히 걸어가는 일이다.


밖은 여전히 겨울비처럼 차가웠지만 우리 둘의 저녁은 조용하고 따뜻했다.








이전 15화10.15.내일의 나를 조금 더 건강하게 만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