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도암으로 인한 항암과 방사선 치료 후 퇴원 58일차의 기록
비가 그치고 난 뒤 창문 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바람은 한층 차가워져 있었다. 아침 햇살이 밝았음에도 불구하고 거실의 공기는 마치 온도를 한참이나 낮춰둔 듯 싸늘했다.
오전 10시부터 볼링 시합이 있는 아내는 이른 아침부터 서둘러 준비를 마쳤다. 아내에게 볼링은 단순한 취미가 아니라 일종의 피로회복제 같은 존재다.
평소라면 늦잠을 자고 있을 휴일 아침인데, 시합이 있는 날이면 누구보다 먼저 일어나 환한 얼굴로 준비를 마친다. 나보다 먼저 거실에 앉아 준비를 마치고 미소 짓는 아내를 볼링장에 데려다 주었다.
“오늘은 느낌이 좋아.”라고 말하는 아내에게 “부담 없이 즐기다 와요.”라고 웃으며 답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곧장 집으로 돌아갈까 하다가, 기왕 나온 김에 발걸음을 산책로로 돌렸다. 비가 갠 뒤의 공기는 한결 맑았고 가을 냄새가 묻어 있었다.
휴일 오전이라 사람이 많을 줄 알았지만 의외로 길은 한산했다. 오늘은 평소처럼 빠른 걸음이 아니라 근육을 쉬게 하는 느린 걸음으로 오랜만에 풍경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연꽃 습지에 이르자, 한때 초록의 힘으로 습지를 가득 메우고 연분홍 꽃을 피워 올리던 연꽃 잎들이 이제는 갈색 옷으로 갈아입고 있었다.
습지 위에서 축 처진 잎들은 고개를 깊이 숙인 채, 바람이 스치면 미세하게 흔들리며 내게 인사를 건네는 듯 보였다. 그 장면을 마주하자 가슴 깊은 곳에서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이 조용히 밀려왔다.
한때 나 역시 저 잎들처럼 생기로 가득했던 시절이 있었다. 어떤 고통도 잠시일 뿐이라 믿으며 그저 묵묵히 버티면 다시 푸르른 날이 올 거라 스스로 다독이던 시간들.
하지만 항암과 방사선의 시간을 지나며 나는 내 몸과 마음이 어떻게 시들어가는지를 직접 바라보아야 했다.
매일 아침 거울 속의 얼굴이 조금씩 달라지고, 링거줄을 몸에 달고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 있는 나는 살아 있다는 사실보다도 버티고 있다는 사실로 하루를 위로 받았다.
그런데 오늘, 시든 연꽃 잎들을 바라보며 문득 깨 달았다. 시들어 가는 것이란 죽음이나 사라지는 과정이 아니라 다음 생명을 준비하는 침묵의 시간이라는 것을.
지금 고개를 숙인 갈색의 연꽃 잎들은 죽어가는 게 아니라, 내년의 초록을 위해 자신의 자리를 비워주는 중이다.
그리고 그 아래 보이지 않는 진흙 속에의 뿌리들은 새로운 싹이 조용히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나의 회복도 그러하리라. 지금은 체력이 떨어지고, 아직은 음식의 맛을 온전히 느끼지 못하지만 내 안 어딘가에서는 분명 다시 살아나려는 힘이 조금씩 움트고 있을 것이다.
그것은 약의 힘도, 병원의 처방도 아닌, 단지 다시 살아보려는 마음에서 비롯된 생의 본능일지도 모른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나는 그 사실을 되새겼다.
시들어 보이는 지금의 나도 언젠가 다시 푸르게 피어날 날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 고통의 계절을 견디는 이 시간이 내 인생의 또 다른 봄을 위한 뿌리 내림의 시간이라는 것을 나는 조금씩 알아 가고 있다.
연꽃잎들이 물결 위에서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마치 그들의 잔잔한 몸짓이 내게 속삭이는 듯 바람소리와 함께 들려왔다.
“조급해하지 말아라, 너의 뿌리도 지금, 다음 생을 위해 자라고 있을 것이다.”라고.
그 속삭임과 함께 느껴지는 오늘의 바람은 차가웠지만 이상하게 따뜻했다.
금호강을 따라 걷는 산책로는 작년부터 공사를 해서 잠시 통행이 제한되었었다. 오늘 오랜만에 그 길을 다시 걸으며 문득 눈에 들어온 것은 예전엔 없던 낯선 시설물이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조류 관찰대’였다. 금호강의 환경이 조금씩 회복되면서 철새들이 머무는 시간이 길어졌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강변 중간에 적당한 위치에 설치되어 있었고 주변의 풍경을 가리지 않도록 나무색의 재질로 만들어져 철새들이 한창일 때는 제법 괜찮은 공간이 될 것으로 보였다.
그곳에 잠시 앉아 강 위를 비추는 햇살과 새들의 날개 짓을 바라보았다. 비록 많은 새들이 있지는 않았지만 관찰대 위에서 내려다본 강물은 가을 햇살을 받아 반짝였다.
가을 바람을 맞으며 걷는 시간이 생각보다 길어졌다. 집이 가까워졌을 무렵 아내에게서 볼링 시합이 거의 끝나간다는 연락을 받았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가볍게 샤워를 마치고 다시 차에 올라 볼링장으로 향했다.
시합 결과는 기대했던 것보다는 조금 아쉬웠지만 순위권에 들어 작은 상품을 받았다며 아내는 선물 봉투를 들고 아이처럼 환하게 웃고 있었다.
돌아오는 길, 오늘의 결과에 충분히 만족스럽다며 즐거워하는 아내의 밝은 기운이 차안을 가득 메웠다.
비록 아내는 오늘 자신이 원하는 완벽한 결과를 얻지 못했지만, 최선을 다해서 좋은 결과를 얻었다는 것만으로도 즐겁고 행복해 보였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차창 밖으로 조금씩 노을이 물들고 있었다. 하루의 끝에서 아내 덕분에 웃을 수 있다는 것, 그 것 이야말로 가장 값진 회복의 증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하루는 특별한 일이 없었지만 그 안에 작은 평화가 있었다. 시들어 있는 잎과 다시 피어날 꽃, 강에 비친 햇살과 철새들 그리고 아내의 밝은 웃음까지.
이 정도면 충분히 괜찮은 하루였다.
그렇게 나는 또 하나의 회복된 하루를 조용히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