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도암으로 인한 항암과 방사선 치료 후 퇴원 61일차의 기록
오늘의 날씨는 어제보다 더 차가웠고 초겨울을 연상케 할 정도로 싸늘한 하루였다. 게다가 이슬비까지 흩날리며 하늘이 한층 더 어둡고 차갑게 느껴졌다.
오전에는 이번 주부터 읽기 시작한 양귀자 소설 <원미동 사람들>을 펼쳤다.
블로그 이웃 ‘별꽃’님이 선물로 보내준 책이다.
1987년의 시대상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이 작품을 읽으며 어린 시절의 기억들이 하나둘 떠올랐다. 책 속 골목길 묘사를 따라가다 보니 초등학교를 마치고 돌아오던 오후의 풍경이 눈앞에 그려졌다.
철제 대문마다 걸려 있던 문패, 담장 너머로 고개를 내밀던 감나무, 골목 입구에 자리잡은 작은 슈퍼 앞의 오락기계까지. 오래된 문장 하나하나가 잊고 있던 시간의 냄새를 되살려 주었다.
<원미동 사람들>을 읽으며 사람이라는 존재의 끈질긴 생명력을 느꼈다. 아무리 힘겨운 현실 속에서도 사람들은 여전히 누군가를 사랑하고 실망하고, 또 내일을 살아내기 위해 하루를 버텨낸다.
삶이 우리에게 주는 고통은 불공평하지만 그 속에서도 사람들은 저마다의 방법으로 버티고 다시 일어선다. 그게 원미동 사람들의 이야기였고 지금 나의 이야기이기도 했다.
소설 속 부천 원미동 사람들의 삶을 글로 읽으며 누군가의 삶을 들여다본다는 건 결국 나 자신을 비추어보는 일이라는 걸 새삼 느꼈다.
이 책 속 인물들이 서로의 결핍을 끌어안고 하루를 살아내듯, 나 또한 회복의 과정 속에서 내 안의 부족함을 조금씩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때는 모두가 가진 것이 많지 않았지만 이상하게도 마음만은 넉넉했던 시절이었다.
책장을 덮으며 그 시절의 내 얼굴을 떠올려 보았다. 어쩌면 지금보다 더 단단하고 더 순수했던 나였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한 권의 책이 잊고 있던 기억을 불러주었고 그 기억이 오늘 하루를 따뜻하게 채워주었다.
‘별꽃’님께 다시 한 번 마음 속으로 감사 인사를 전했다.
뉴스에서 오늘은 비소식이 없다고 해서 운동 준비를 마치고 창밖을 보니 어느새 비가 내리고 있었다. 인터넷을 확인해도 비는 예보되어 있지 않았지만 창밖에 비가 내린다.
결국 입은 옷 그대로 자전거의 페달을 힘껏 밟으며 오늘의 운동을 대신했다. 운동을 마치고 나니 비는 그쳐있었고 어느새 차가운 공기 위로 해가 비추고 있었다.
오늘 저녁 프로야구 준플레이오프가 어제에 이어 대구에서 열렸다. 야구를 사랑하는 대구의 많은 사람들이 하나의 마음으로 응원했지만 어제는 아쉽게 패배를 했다.
오늘 경기 결과에 따라 플레이오프 진출이 결정되는 중요한 날이라 그런지, 가는 곳 마다 묘한 긴장감으로 감도는 듯했다. 저 멀리 야구장에서 뻗어져 나오는 불빛이 환하게 거리를 비추고, 만원관중이 외치는 함성소리가 도로에 들려왔다.
결과야 어찌 되든 응원하는 마음만큼은 모두 같았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의 응원에 응답하듯 초겨울을 연상케 하는 찬바람 속에서도 선수들을 최선을 다해주었다.
경기는 엎치락뒤치락 긴장의 연속이었다. 결국 삼성이 승리를 거두었고 플레이오프로 향하는 최종 팀은 모레 대전에서 결정되게 되었다. 경기의 승패를 떠나 선수들의 집중력과 팬들의 열기가 대단했다.
비록 내가 응원하는 팀의 경기는 아니지만 이 경기를 보며 느낀 점은 인생의 리듬도 결국 그 경기와 다르지 않다는 것이었다. 한순간 앞서 나가다 다시 역전을 허용하고 때로는 아무런 예고 없이 기회를 얻기도 한다.
모든 것이 내 뜻대로 흘러가는 듯하다가도 어느 순간 예상치 못한 실수 하나로 분위기가 바뀌는 일도 있다. 하지만 경기의 묘미는 바로 그 예측 불가능함 속에 있다. 정해진 결말이 없는 긴장과 변수가 오히려 삶을 더 생생하게 만든다.
인생도 그렇다. 완벽한 계획 속에서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누구나 크고 작은 역전과 반전을 겪는다. 앞서나가는 날이 있는가 하면 뒤처지는 날도 있다. 중요한 건 점수판이 아니라, 매 순간 다시 타석에 서는 마음이다.
넘어지고 흔들리고 잠시 주저앉더라도 경기를 포기하지 않는 의지를 잃지 않는 그것이 결국 인생을 완성시키는 힘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