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3.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의 변화를 본다.

편도암으로 인한 항암과 방사선 치료 후 퇴원 62일차의 기록

by 마부자


늦가을의 공기는 조금차가웠지만 햇살은 여전히 따뜻했고 그 햇살을 따라 오늘도 가을 길을 걷기 위해 집을 나섰다. 운동을 마치고 집 인근에 다다를 즈음, 멀리서부터 커다란 확성기 소리가 들려왔다.


가을 하늘을 가르며 울려 퍼지는 그 소리는 처음엔 무슨 행사인가 싶었는데, 가까이 갈수록 익숙한 리듬의 구호와 박수가 섞여 들려왔다.


소리의 근원은 바로 초등학교 운동장이었다. 운동장에는 커다란 칠판이 세워져 있었고 청팀과 백팀으로 나뉜 숫자가 칠판 위에 크게 적혀 있었다.


‘00초등학교 체력 한마당’이라는 현수막이 걸려 있었고 만국기가 운동장 위로 하늘에 펄럭이고 있었다. 순간, 오랜 시간 잊고 있던 기억이 그 소리와 함께 되살아났다.


multiple-national-flags-961586_1280.jpg?type=w1 사진출처: 픽사베이

멀리서 들릴 때는 아이들의 환호와 확성기 소리가 어지럽게 섞여 들려왔지만, 가까이 도착해 보니 운동장은 의외로 조용했다.


시간을 확인하니 점심시간이었다. 아이들은 모두 교실로 들어가 점심을 먹고 있는 듯했다.


빈 운동장 위로 가을바람이 불고, 만국기가 흔들릴 때마다 깃대에서 작은 금속 소리가 들려왔다. 그 장면을 보며 나는 문득 내 어린 시절의 운동회를 떠올렸다.


그때는 점심시간이면 운동장이 오히려 가장 북적였다. 가족들이 하나둘 운동장 외곽으로 모여 돗자리를 깔고, 집에서 싸온 음식을 꺼냈다.


김밥과 삶은 계란, 사이다와 감이 놓여 있던 돗자리 위에는 언제나 웃음이 넘쳤다. 엄마는 한쪽에서 도시락을 펴고 아버지는 사진기를 들고 있었고 나는 하얀 운동화를 벗은 채 흑바닥 위에 앉아 김밥을 입안 가득 넣었다.


ChatGPT_Image_2025%EB%85%84_10%EC%9B%94_23%EC%9D%BC_%EC%98%A4%ED%9B%84_10_03_36.png?type=w1 그림 제공: 챗gpt

그 시절의 운동회는 경기보다도 가족이 모이는 날이었다.

달리기보다 김밥이 기억에 남고

승패보다 엄마의 웃음이 생각났다.


운동회가 시작되면 서로 영차! 영차! 청군 이겨라, 백군 이겨라를 외치며 아이들의 응원 소리가 운동장을 가득 메웠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그 안에 섞여 들리던 부모들의 환호, 선생님과 엄마와 손을 발을 묶고 달리던 모습, 그리고 운동장 한가운데 세워진 둥근 박을 터뜨리기 위한 가득했던 오재미들과 죽어라 달려도 1등 한번 못해봤던 달리기 까지.


그 모든 것이 지금의 나에게는 시간이 아닌 감정으로 남아 있다. 다시 걸음을 옮기며 나는 빈 운동장을 한 번 더 바라보았다.


지금의 아이들은 교실에서 급식을 먹으며 다시 오후 경기를 준비하고 있겠지만 그들의 기억 속에도 오늘의 햇살과 소리가 언젠가 따뜻한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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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대가 달라도 그 운동장의 열기와 설렘은 같을 것이다. 가을 하늘 아래에서 펄럭이는 만국기를 보며 나는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누군가의 추억이 되고 누군가의 기억이 되어 사는 것. 그것이 시간의 의미이자 삶의 리듬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집으로 돌아와 간단히 점심을 먹고 책상에 앉아 <원미동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어 내려갔다. 1987년, 그 시절 사람들의 삶 속에는 어른들의 고단한 하루뿐 아니라 아이들의 순박한 세상도 함께 담겨 있었다.


책장을 넘기며 오전에 보았던 초등학교 운동회의 풍경이 다시 떠올랐다. 멀리서 들리던 확성기 소리, 만국기가 펄럭이던 운동장, 그리고 점심시간의 고요함.


비록 아이들이 뛰어노는 모습을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이상하게도 오늘 읽은 <원미동 사람들> 속 장면들과 묘하게 겹쳐졌다.


아마도 이번 주부터 읽기 시작한 이 책이 내 시선을 운동회의 기억 속으로 더 깊이 빠져들게 만든 것 같다. 책 속의 아이들과 운동장의 아이들이 한 시공간 속에서 자연스레 이어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현실의 풍경과 문학의 세계가 한순간에 포개지는 경험, 그것이야말로 독서가 주는 묘한 감정이 아닐까 생각했다.마지막 책장을 덮으며 문득 떠올랐다.


이전에 읽었던 양귀자 작가의 두 권의 작품, <모순>과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과는 결이 확연히 달랐다. 전자가 당찬 여성 안진진과 강민주를 중심으로 강렬한 저항의 서사를 담고 있다면, <원미동 사람들>은 훨씬 더 조용하고 느리며, 인간의 일상과 그 속의 온기를 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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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한 의지보다도 작지만 단단한 생의 끈을 잡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한 작가의 여러 작품을 차례로 읽다 보면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의 변화를 함께 따라가게 된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작가가 세상을 향해 내던지던 결기와 질문은 시간이 지나며 사람들의 일상으로, 그리고 평범한 삶 속의 진심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그 변화를 읽는 일은 단순히 책을 읽는 것을 넘어, 한 사람의 인생 궤적을 함께 바라보는 일처럼 느껴졌다.

문학이란 어쩌면 그렇게 잊고 있던 시간의 한 조각을 불현듯 불러오는 마법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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