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도암으로 인한 항암과 방사선 치료 후 퇴원 63일차의 기록
가을의 주인이 다시 돌아온 듯한 새벽이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초겨울의 찬 기운이 새벽 공기를 점령하고 있었는데, 오늘은 다시금 선선하고 부드러운 바람이 창문 사이로 스며들었다.
오랜만에 창문을 활짝 열어두고 책상 앞에 앉았다. 차가운 공기 대신 가을 특유의 풍요로운 냄새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오늘은 ‘조합’이라는 단어에 대한 글을 정리했다.
조합이라 하면 단순히 여러 요소를 하나로 모으는 행위라 생각했지만, 어쩌면 그것은 서로 다른 두 존재가 만나 더 강한 둘이 되는 과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투병도, 가족의 일상도, 어쩌면 이런 조합 속에서 버텨온 것인지도 모른다.
글을 마치고 나니 어느새 두 사람이 현관문을 나서는 소리가 들렸다. 두사람이 출근 인사 뒤로 다시 조용해진 집 안에서 나는 어제 끝낸 <원미동 사람들>의 서평을 쓰기 시작했다.
11편의 단편이 하나의 세계로 묶여 있는 책. 그 각각의 이야기들이 모여 한 시대의 공기를 만들어내는 구조가 마치 내 일상과도 닮아 있었다.
모든 이야기를 다 쓰려니 막막했고, 결국 가장 인상 깊었던 네 편만 선택해 글을 정리하기로 했다.
그 순간 문득 ‘남의 이야기를 읽고 나의 감정으로 다시 써내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새삼 느꼈다.
어쩌면 서평이란, 타인의 문장을 빌려 내 마음을 해석하는 또 하나의 조합일지도 모른다.
오전 10시 무렵, 막내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빠, 머리가 어지러워서 조퇴해야 될 것 같아요.” 그리고 곧 담임선생님이 통화를 이어받았다.
그제 병원에 다녀오고 별 말이 없길래 나아졌다고만 생각했는데, 다시 증상이 나타난 모양이었다.
잠시 후 현관문이 열리고, 막내는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아빠, 큰 병원에 가봐야 할까요?”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큰 병원’이라는 단어는 아직도 내게 공포와 기억을 동시에 불러오는 말이었다.
지난해 내게서 처음 편도암이 발견되었을 때, 동네 병원 의사가 했던 바로 그 말. 이유 없이 짜증이 솟구쳤다.
아픈 사람이 아프다는 말을 들으면 괜히 화가 나는,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화는 내 몸을 제대로 지키지 못한 나 자신에게 향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순간, 막내에게 화살처럼 쏘아버린 말은 결국 아이의 얼굴을 굳게 만들었다. 문을 닫고 들어가 버린 막내 방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미안함보다 부끄러움이 더 컸다.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가 아이의 상태를 물었다. 고개를 숙였다 들면 정수리 부근에 통증이 있고, 계단을 오르내릴 때 어지럼증이 심하다고 했다. 순간 아내의 뇌출혈이 떠올랐다.
의사가 말했던 ‘유전적 요인 가능성’을 기억하고 있었기에, 겁부터 났다. 나는 곧장 아이와 함께 인근 내과로 향했다. 진료를 본 의사는 신경계 문제일 가능성이 높다며 신경과 진료를 권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또 한 번 긴장이 밀려왔다. 신경외과가 아닌 신경과, 그 미묘한 단어의 차이 속에서도 마음은 이미 불안으로 가득찼다. 가까운 곳에 신경과가 없어 차로 30분 거리에 있는 병원으로 이동했다.
신경과 의사는 다행히 큰 이상은 없다고 했다.
오랜 시간 공부나 스마트폰 사용으로 인해 목과 신경이 눌려 일시적으로 생긴 증상일 수 있다며, 약을 처방해 주었다. 약봉지를 들고 나오는 길, 마음 한구석에서 긴장이 풀리며 갑자기 밀려드는 후회가 나를 덮쳤다.
차 안에서 나는 아이에게 사과했다.
“아빠가 괜히 화를 냈다. 미안하다.”
막내는 나를 빤히 보더니, 이내 해맑게 웃었다.
“괜찮아요. 근데 아빠, 점심은 피자 먹으면 안 돼요?”
순간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몸도 안 좋은데 무슨 피자냐?”
그러자 아이가 말했다.
“아플수록 먹고 싶은 걸 먹어야 낫는 법이에요.”
그 말에 마음이 스르르 녹아내렸다. 이 녀석, 오늘은 나보다 훨씬 어른스러웠다.
결국 피자는 저녁 메뉴로 미루고 점심은 근처 식당에서 함께 해결했다. 언제 아팠냐는 듯 밥을 깨끗이 비워내
는 아이를 보며 웃음이 났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막내는 커피전문점 앞에서 “시원한 스무디 먹고 싶어요”라고 했다. 그래서 둘이 나란히 앉아 처음으로 커피전문점에서 시간을 보냈다. 병원 진료보다 더 긴, 더 따뜻한 시간이었다.
집에 돌아와 나는 아이에게 “오늘과 내일은 절대 외출 금지”라며 농담 섞인 포고문을 내렸다. 잠시 뒤 방문을 열고 나온 막내가 웃으며 말했다.
“아빠랑 병원 가고 밥 먹고 스무디 마셨더니, 이상하게 아픈 게 다 나은 것 같아요.”
그 말을 들으며 나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아마 병보다 더 큰 치료제는 ‘함께 있음’이 아닐까.
오늘 나는 다시 깨달았다. 회복은 약이 아니라 관계에서 온다는 것을.
내가 막내에게 화를 내고, 미안해하고, 웃었던 모든 감정의 조합이 결국 나를 다시 인간답게 만들어주는 과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