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5.오늘은 오랜만에 진짜
‘밤’을 맞는 느낌이다

편도암으로 인한 항암과 방사선 치료 후 퇴원 64일차의 기록

by 마부자


사실 어제 막내의 어지러움증 사건이 아니었다면 아내와 나는 이미 전북 완주로 향했을 것이다.


오래전 캠핑 동호회에서 인연을 맺었던 친구와 후배가 운영하는 동호회의 정기모임에 참석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퇴사하면서 대부분의 캠핑용품을 회사의 후배에게 넘기고 나니 남은 것은 오래된 침낭 하나와 작은 의자뿐이었다.


하지만 동호회의 후배가 “몸만 오시면 됩니다”라며 웃던 말을 믿어보기로 했다. 그래서 이번 여행은 오랜만에 그 말을 그대로 실천해보기로 한, 짐보다 마음이 가벼운 여행이 될 예정이었다.


다만 막내의 상태가 완전히 괜찮다고 단정할 수 없었기에 하루는 더 지켜본 뒤 1박 2일로 일정을 줄이기로 했다. 아내는 평소보다 이른 새벽부터 분주하게 움직였다.


간단히 침낭과 전기장판, 세면도구만 챙기면 되는 일이었지만 그녀의 손길에는 오래 미뤄두었던 설렘이 묻어 있었다. 마치 첫 여행을 떠나는 사람처럼 작은 물건 하나하나를 확인하며 꼼꼼히 챙겼다.


생각해보면 아내와 단둘이 여행을 떠나는 것은 지난 5월, 병을 진단받기 직전에 다녀온 전라도 궁평항 이후 처음이었다. 그때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아직 아무것도 몰랐던 그 시절의 우리.


병원이라는 낯선 공간이 일상이 되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하던 때였다. 그래서인지 오늘의 이 출발은 단순한 여행이 아니라 병 이후 처음으로 다시 ‘삶의 바깥’으로 나서는 조심스러운 복귀처럼 느껴졌다.


아내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오랜 시간 나를 간병하느라 갇혀 있던 마음이 이번 여행을 통해 조금이나마 숨통을 틀 것이라는 걸.


그 마음을 알기에 나도 모르게 준비하는 그녀의 모습을 오래 바라보게 되었다. 얼굴에는 긴장과 설렘이 동시에 묻어 있었고 그 미묘한 표정이 왠지 모르게 고마웠다.


병을 앓은 이후 나는 모든 ‘처음’을 새롭게 경험한다. 단순한 외출도 한 끼의 식사도, 그리고 이런 짧은 여행 그것도 텐트에서 잠을 자는 캠핑은 더욱 더.


그 모든 것에 ‘다시’라는 단어가 붙는다. 다시 걷고, 다시 웃고, 다시 떠나는 일. 오늘의 여행도 그 연장선 위에 있다. 짐을 마저 차에 싣고 나니 아침의 공기가 한결 선선했다. 창문을 내리자 가을의 냄새가 밀려들었다.


완주로 향하는 길은 언제나처럼 멀겠지만 오늘만큼은 그 거리가 우리에게 쉼의 공간이 되어줄 것 같았다. 그렇게 우리는 오랜만에 그리고 아주 천천히 일상에서 벗어나는 연습을 시작했다.


예전에 나는 여행을 갈 때, 일명 ‘논스톱형 운전자’였다. 출발과 동시에 목표는 단 하나였다.


가능한 한 빠르게 단 한 번의 휴게도 없이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 주유나 급한 생리현상이 아니면 절대 차를 세우지 않았다.


그게 내가 생각하는 효율적인 여행이었다. 이동의 시간을 줄여 일정을 하나라도 더 소화하는 것, 그것이 곧 여행의 본질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오늘은 그 모든 원칙을 내려놓았다.


목적지가 캠핑장 하나뿐이었기 때문이다. 도착하자마자 해야 할 일도 시간에 쫓길 이유도 없었다. 그래서 아내와 나는 ‘오늘은 천천히 가자’며, 틈이 날 때마다 휴게소에 들르기로 했다.


경부고속도로를 지나 중앙고속도로 지선에는 차가 많았지만 광주–대구고속도로에 접어드는 순간 세상은 달라졌다.


한산한 고속도로 위를 달려 완주로 향하는 길에 있는 논공, 거창, 함양, 지리산, 남원까지 다섯 개의 휴게소를 모두 들르게 되었다. 처음에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는데 결과적으로는 ‘전 휴게소 투어’가 되어버렸다.


첫 번째, 논공휴게소. 잠시 화장실만 다녀왔다.

두 번째, 거창휴게소 도착 직전 아내가 “조금 출출한데 뭐라도 먹을까?” 해서 휴게소에 들러 간식 코너로 향했다. 그런데 돌아온 손에는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았다.


“호떡이 먹고 싶었는데 내 앞에서 만들어 놓은 게 다 팔렸어.”

“그럼 좀 기다리지 그랬어.”

“얼마나 걸리냐고 물었는데 대답도 안 하더라고. 기분 나빠서 그냥 나왔지 뭐.”


나는 웃으며 말했다.

“잘했어. 다음 휴게소에서 먹으면 되지.”


그런데 함양휴게소에는 호떡이 없었다.

아내는 오기가 생겼다며 “오늘 호떡이 아니면 아무것도 안 먹을 거야.”

나는 웃음이 나왔지만 그 결연한 표정을 보니 말릴 수도 없었다.


그러나 다음 지리산 휴게소에도 호떡은 팔지 않았다. 그리고 마지막 희망인 남원휴게소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곳은 주차장 겸 화장실만 있는 작은 휴게소였다. 호떡은커녕 어묵조차 팔지 않았다.


결국 우리는 대구에서 완주로 향하는 동안 다섯 개의 휴게소를 모두 섭렵했지만, 그 흔한 간식 하나 먹지 못한 채 출출한 배를 안고 차를 몰았다. 남원IC를 나와 국도를 달리며 창문 밖으로 스치는 산 그림자와 아내의 투덜거림이 묘하게 어울렸다.


언젠가 나는 목적지에 닿는 것만이 여행이라고 생각했지만, 오늘은 달랐다. 아무것도 먹지 못한 다섯 번의 정차가 오히려 우리에게는 작은 이야기로 남았다.


여행은 어쩌면 ‘도착’이 아니라 그 사이에 벌어지는 수많은 ‘멈춤’의 순간들이 만든다는 걸 오늘, 휴게소 다섯 곳을 지나며 조금 깨 달았다.


그렇게 3시간 동안 물만 마시며 달려 도착한 목적지의 이름은 “완주 술 체험박물관”이었다. 아이러니했다. 한때는 ‘대한민국의 모든 술을 정복하겠다’는 기세로 살던 내가 이제는 술 한 방울도 입에 대지 않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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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 역시 가끔 맥주 한두 잔 정도가 전부였다. 그래서 이곳이 우리 부부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장소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이 여행의 목적은 술이 아니라 사람, 그리고 오랜 인연이었다.


후배가 미리 쳐둔 텐트 안으로 들어가 전기장판을 깔고 침낭을 펼쳤다. 캠핑이라기보다, 오랜만에 떠난 소풍 같았다. 바닥에 앉아 숨을 고르니, 차 안에서 쌓인 피로가 서서히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잠시 후 후배가 “형님, 고생 많으셨습니다!” 하며 거점 텐트로 우리를 불렀다. 그곳엔 이미 전라도만의 향기가 가득한 음식들이 한가득 차려져 있었다.


우리가 휴게소마다 들렀지만 호떡 하나 먹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하자, 모두 폭소가 터졌다.

“형수님, 호떡은 제가 바로 구워드리겠습니다!”

라며 한 후배가 즉석에서 밀가루 반죽을 꺼내드는 바람에 텐트 안은 웃음바다가 되었다.


그렇게 우리의 오랜만에 만남은 큰 웃음으로 시작되었다. 해가 조금씩 산너머로 넘어갈 즈음 어제 도착했던 동호회 사람들도 하나둘 텐트 밖으로 나왔다.


반가운 얼굴들과의 재회는 따뜻한 포옹으로 시작되었다. 서로의 안부를 묻고, 머리가 희끗해진 모습을 보며 농담을 주고받았다.


누군가는 나의 투병 소식을 듣고 조심스레 손을 잡아주었고 또 다른 이는 “형님, 얼굴 좋아 보이십니다” 하며 어색한 위로를 건넸다.


모닥불 앞에 둘러앉은 사람들의 얼굴은 주황빛 불꽃에 물들어 있었다. 불꽃이 타오르고 한잔 두잔 마신 술이 취기가 오르자 튀는 소리 사이로 각자의 이야기가 흩어졌다. 회사 이야기, 아이들 이야기, 그리고 지나간 세월에 대한 웃음과 조금의 분노가 섞인 소리들이었다.


술을 마시자 않은 나는 오늘 그저 듣고만 있었다. 오랜만에 ‘듣는 것’이 이렇게 편안한 일인지 몰랐다.


언젠가 나는 술이 사람을 이어주는 매개라고 믿었다. 그러나 오늘은 알겠다. 술이 아니라 ‘기억’이 사람을 이어주는 것이다.


같은 추억을 나눈 사람들이 다시 한자리에 모여 웃고 이야기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인연의 본질이었다.


불빛이 점점 잦아들 무렵, 아내가 먼저 텐트로 향했다. 그리고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과 깊은 밤을 타오르는 장작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불길이 잦아드는 만큼 바람은 차가워졌지만, 마음은 오히려 따뜻했다. 오늘은 더 이상 아무 계획도 필요하지 않았다.


우리는 충분히 도착했고 충분히 머물렀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오늘의 여행은 완전했다. 다른 이들보다 조금 먼저 텐트 안으로 들어와 일기를 쓴다.


밖에서는 여전히 웃음소리와 장작 타는 소리가 뒤섞여 밤공기를 데우고 있다. 작은 텐트들이 옹기종기 모인 사이로 불빛이 흔들리고 장작불의 붉은 빛이 그 틈을 따라 춤추듯 번지고 있었다.


아이들의 웃음소리 사이로 가끔 울음이 섞여 들린다. 금세 또다시 웃음으로 이어지는 그 순환이 참 사람답다고 느껴진다. 어른들의 웃음은 조금은 다른 온도를 지닌다. 다소 거칠고 낮지만, 그 안에도 오랜 시간 눌러두었던 감정이 녹아 있다.


술잔을 부딪히며 웃는 소리, 기타 소리, 누군가의 노랫소리가 한데 섞여 이 밤의 풍경을 완성한다. 나는 그 소리들을 멀찍이서 듣고만 있다.


예전이라면 중심에 서서 함께 웃고 노래했을 테지만, 오늘은 그저 듣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어쩌면 지금의 나는 사람들 사이보다, 이 조용한 텐트 안에서 세상의 소리를 한 걸음 떨어져 듣는 일이 더 어울리는지도 모르겠다.


불빛이 천막의 얇은 천을 통과해 은은하게 번지고, 그 빛 사이로 아내의 그림자가 조용히 움직인다. 무심히 스치는 그 그림자에도 이상하게 마음이 놓인다.


아마 오늘은 오랜만에 진짜 ‘밤’을 맞는 느낌이다.

낯선 곳에서 들리는 사람들의 웃음과 장작불의 온기, 그리고 이렇게 조용히 펜을 움직이는 순간이 어딘가 잘 살아가고 있다는 증거처럼 느껴진다.


오늘 하루는 그렇게 천천히, 그리고 고요하게 마무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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