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6.자연이 건네는 작고
평온한 위로였다.

편도암으로 인한 항암과 방사선 치료 후 퇴원 64일차의 기록

by 마부자


정말 오랜만이었다. 천으로 된 둥근 지붕 아래서, 딱딱한 바닥에서 올라오는 한기를 느끼며, 침낭 위로 스며드는 적당한 찬 공기를 맞으며 잠을 청한 것.


사람들의 웃음과 이야기 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이 든 것도 참 오랜만이었다. 오늘 아침, 우리 부부는 캠핑을 접은 지 약 8년 만에 야외의 작은 텐트 안에서 눈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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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공기 속에서 들려온 건 이름 모를 새소리와 벌레 소리 그리고 사람들의 발소리였다. 눈을 뜬 아내에게 불편하지는 않았느냐 묻자, 뜻밖에도 “정말 편하게 잤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 말에 마음이 놓였다. 어젯밤엔 바람도 세지 않았고 기온도 적당했으니 전기장판의 온기와 두꺼운 침낭이 그 어느 때보다 아늑한 잠자리를 만들어준 셈이었다.


물론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말소리에 잠이 조금씩 깨어나긴 했다. 하지만 그 소음조차도 도시의 소음과는 달랐다. 불빛과 말소리, 웃음이 섞인 그 밤의 소리는 자연의 리듬에 가까웠다.


낯설지만 묘하게 위로가 되는 살아있는 사람들의 숨결이었다. 이번 캠핑은 동호회에서 주최한 단체 캠핑이었다. 대부분이 경험 많은 캠퍼들이라 캠핑 예절이 잘 지켜졌다.


늦은 밤까지 크게 떠드는 이도 없었고, 아이들의 웃음소리도 11시 무렵이면 사그라들었다. 불빛이 꺼진 후에도 여기저기 장작불 곁에서 삼삼오오 모여 나누는 대화만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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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소리는 소음이라기보다는 하나의 풍경이었다.

불빛, 냄새, 온기, 그리고 목소리,

그 모든 것이 하나로 섞여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주었다.


캠핑의 마지막 날 아침은 늘 분주하다. 2박 동안 따뜻하게 지켜주던 텐트를 정리하고 함께한 사람들과 마지막 식사를 나눈다. 처음엔 간단히 시작하지만 남은 반찬과 음식들이 하나둘 꺼내지다 보면 어느새 긴 테이블 위엔 한정식처럼 푸짐한 식탁이 완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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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는 커피를 내리고 누군가는 불판 위에서 고기를 굽는다. 그 사이로 웃음소리가 오가고 “다음에 또 봅시다”라는 인사가 이어진다.


모든 것이 오랜만이었다. BBQ의자에 걸터앉아 아침부터 밥과 고기를 함께 먹는 일, 그저 식사 한 끼가 아닌 마음을 나누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식사 후 아내와 함께 어제 보지 못했던 박물관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캠핑장 뒤편에 자리한 그곳에는 오래된 술항아리와 전통주가 전시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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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실내에는 유리 진열장 너머로는 오랜 세월의 숨결이 차분히 흘러나오는 듯했다. 술을 빚던 사람들의 손끝, 향을 담던 항아리의 온기, 그리고 그 시대의 공기가 느껴졌다.


잠시 둘러보던 중, 후배에게서 연락이 왔다. 박물관 측에서 단체 행사로 마련한 ‘우리 술의 역사’ 강연에 참석해달라는 요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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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을 정리할 필요가 없는 우리 부부는 흔쾌히 그 자리에 동참하기로 했다. 그런데 막상 도착해보니 내가 예상했던 단조로운 강연의 분위기와는 전혀 달랐다.


긴 테이블 위에는 각양각색의 예쁜 술잔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그 옆에는 한입 거리의 전과 과일, 그리고 치즈가 정갈하게 담겨 있었다.


강연이라기보다는 마치 작은 연회 같은 분위기였다. 술을 마시지 않는 우리 부부는 잠시 머뭇거렸다.

‘이 자리에 우리가 있어도 될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강연은 시작되었고, 문은 닫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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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리에서 일어나기엔 분위기가 너무 좋았다. 강연자의 목소리에는 묘한 힘이 있었다. 박물관을 운영하는 ‘수작’이라는 단체의 대표는 “술은 단순한 음료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문화의 연결 고리”라고 말했다.


그 말이 이상하게 마음에 남았다. 술잔을 들지 않아도 그 말 한마디면 이미 취한 기분이었다. 강연이 끝나자, 대표는 자신들이 직접 주조한 전통주를 들고 나와 시음회를 열었다.


투명한 잔에 따라지는 술마다 색이 달랐다. 누런빛, 옅은 보라빛, 그리고 맑은 백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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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주의 향이 공간을 가득 메웠고 사람들의 얼굴에는 미묘한 미소가 피어났다.


그런데 이 흐름은 패키지 여행지에서 늘 보아온 익숙한 흐름이었다. 시음이 끝나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판매 담당자가 나타날 것이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쯤 되면 이제 판매 시간으로 넘어가겠지.’


잠시 후 내 생각을 눈치채기라도 한 듯 강연자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늘 이 시간은 술을 파는 자리가 아닙니다. 그저 우리가 지켜온 한 모금의 전통을 함께 느끼는 자리일 뿐입니다.” 그 말에 순간 가슴이 먹먹해 짐과 동시에 나의 선입견에 대한 사고의 편협함에 부끄러운 감정이 들었다.


우리의 오랜 전통을 이어가는 사람들을 나는 단지 장사꾼 취급하고 있었던 것에 대한 미안함에 한동안 그들을 쳐다 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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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술을 마시지 않았지만

그 말 한마디에 이미 충분히 취한 기분이었다.

그저 인간의 온기와 정성이 담긴 문화 한 잔을 나눈 것 같았다.


시음회가 끝나자, 박수와 함께 감사 인사가 이어졌다. 누군가의 진심이 담긴 시간은 이렇게 조용히 마무리되었다. 아내와 나는 준비해둔 지갑을 다시 가방에 넣으며 웃었다. ‘괜히 미안했네, 괜히 걱정했네.’


밖으로 나오니, 가을 햇살이 옹기 종기 모여 있는 캠핑장의 텐트들을 비추고 있었다. 지난 밤 이슬을 말끔히 말려주는 고마운 햇살이었다.


어제는 보지 못했지만, 오늘 아침 박물관을 둘러보다가 눈길을 끄는 공간이 있었다. 며칠 후면 할로윈이라고, 아이들을 위해 꾸며놓은 포토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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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호박 모양의 장식과 거미줄, 그리고 귀여운 유령 풍선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아이들이 몰려와 사진을 찍으며 깔깔대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나는 그 웃음소리를 마냥 편하게 바라볼 수가 없었다. 할로윈이라 하면 이제 즐거움보다는 어딘가 스산한 기억과 공포의 이미지가 먼저 떠오른다.


차디찬 골목에서 안타까운 생을 마감한 젊은이들의 모습을 전하는 그날들의 잔상이 겹쳐졌다. 그저 바람 한 줄기처럼 마음속으로 빌었다.


이곳에서 웃고 떠드는 아이들이

언제나 건강하고 안전하기를 그리고

그 웃음이 세상의 어떤 어둠에도 꺼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강연 참관을 마치고 돌아오니 후배의 캠핑카도 어느 정도 정리가 끝나 있었다. 텐트 사이로 사람들의 움직임이 분주했고 곳곳에서 ‘다음에 또 봐요’라는 인사가 들려왔다.


후배는 간단히 점심을 먹고 출발한다며 인사를 건넸다. 1박 2일 동안 우리 부부를 먹여주고 재워준 그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그는 “다 차려진 밥상에 숟가락 두 개 더 얹은 것뿐이죠”라며 웃었다. 그 농담에 우리도 함께 웃었다.


이번 행사를 주최하느라 얼굴 한 번 보기 힘들었던 친구도 찾아가 인사를 했다. 멀리서 와준 나에게 미안하다고 다음에는 꼭 2박 3일 일정으로 함께하자며 웃음 섞인 협박을 덧붙였다.


그 말 속에 담긴 정이 느껴져 마음이 따뜻해졌다. 짐을 다 정리하고 캠핑장을 나서는 길, 뒤돌아보니 텐트들이 차례로 접히고, 장작불의 연기가 하늘로 옅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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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1박 2일의 캠핑이었지만, 그 안에는 사람의 온기와 계절의 향기가 고스란히 남았다. 그렇게 우리는 천천히 길을 나섰다.


바람에 섞여 들어오는 나무 냄새와 장작 연기의 향기가 오랜만에 마음 깊숙이 스며들었다.

도시에서는 느낄 수 없는, 자연이 건네는 작고 평온한 위로였다.


아내가 조용히 말했다.

“다음엔 정말 2박 3일로 오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캠핑장을 빠져나오는 길, 잠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멀어져 가는 텐트와 패러글라이딩을 하는 사람들이 푸른 하늘의 새처럼 여유로운 비행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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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순간 문득 깨달았다. 이 짧은 1박 2일의 시간은 단순한 여행이 아니었다는 것을.

투병 이후 처음으로 아내와 함께 한 나들이였다.


병실과 집 사이를 오가던 시간 속에서 잊고 지냈던 ‘밖의 세상’이 이토록 다정하고 웃음이 넘치고 있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아내의 웃음소리가 낯설 만큼 오랜만이었고 그 웃음이 바람과 섞여 들려올 때마다 나는 조용히 안도의 숨을 쉬었다.


‘이렇게 다시 함께 나올 수 있다는 것.’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한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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