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도암으로 인한 항암과 방사선 치료 후 퇴원 67일차의 기록
며칠 동안 이어졌던 한파가 잠시 주춤해진 오후였다. 따뜻한 햇살이 잠깐 고개를 내밀자 다시 연꽃습지와 금호강 산책로를 걸었다.
찬 바람은 여전히 남아 있었지만, 그 속에도 묘한 생기가 느껴졌다. 유난히 맑은 하늘 아래에서도 바람에 흩날리는 낙엽들이 인도에 쌓이고 있었다.
늦가을 연꽃습지는 내게 또 다른 풍경을 전해주었다. 얼마전까지 고개를 숙이고 있던 연꽃 잎들이 이제는 거의 다 떨어져 줄기만 우뚝 솟아 남아있는 모습이었다.
뿌리에서 자라난 생명력이 줄기를 세웠지만 꽃잎에는 전달되지 않아 잎은 말라 떨어지고 줄기만 녹색으로 길게 뻗은 모습은 차가운 늦가을의 습지를 더 황량하게 만들었다.
지난 여름 연분홍 빛 꽃을 피웠던 아쉬움을 뒤로하고 겨울을 맞이하기전 남은 자신의 존재를 위해 곧게 뻗어 오른 줄기를 보며 차가운 진흙아래서 그 열정이 느껴졌다.
다 사라진 것 같던 계절의 색이 여전히 남아 있다는 사실이 괜히 반가웠다. 마치 내 몸의 회복도 이처럼 보이지 않게 조금씩 이어지고 있는 것만 같았다.
산책을 마치고 돌아와 따뜻한 샤워를 하고 흰죽으로 점심을 대신했다. 그리고 책상 앞에 앉아 오늘도 어제 이어 읽던 <오만과 편견>을 펼쳤다.
책을 읽으며 주인공 엘리자베스가 편견에 가득한 시선으로 사람과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에 대한 부분에서는 답답한 마음에 나도 모르게 큰소리로 그녀의 편견을 없애 주고 싶은 마음이 들정도로 책에 몰입을 하게 되었다.
내일은 아내와 함께 건강검진을 받는 날이다. 병의 재발이 아닌 회복의 시간을 확인받고 싶다는 바람이 작게 피어오른다.
하루 종일 흰죽 외에는 아무것도 먹지 못한 채, 저녁 9시가 되어 우리 부부는 대장내시경을 위한 약을 마시기 시작했다. 여러 번 겪어보았지만 이 시간은 여전히 힘겹다.
입안 가득 퍼지는 쓴맛과 차가운 냄새, 그리고 위장 깊숙이 번지는 불편함이 몸을 타고 돌았다.
그럼에도 꾹 참고 약을 삼켰다. 잠시 후, 우리는 각자의 화장실로 흩어져 늦은 밤을 보냈다. 두 개의 화장실 불빛이 번갈아 켜졌다 꺼지기를 반복하는 장면이, 어쩐지 조금은 우스꽝스러웠다.
아내는 이 상황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았다.
“이거 먹고 오히려 병이 날 것 같다”고 농담을 건네며, 내시경 약의 혹독함을 대신 표현해주었다.
나는 그 말에 피식 웃었다. 병을 이겨내는 과정 속에서도 결국 우리를 버티게 하는 건 이런 사소한 웃음과 동행의 시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의 밤은 길고 불편하겠지만, 이 짧은 불편함이 얼마나 필요한지 이제는 아내도 나도 너무 잘 알고 있다.
함께 살아온 지난 수년간, 우리는 늘 ‘삶이 바쁘다’는 이유로 몸의 신호를 뒤로 미뤄두고 살아왔다.
건강검진은 내일로 미루고, 휴식은 다음 달로 미루며 그렇게 살아낸 결과를 이제는 혹독하게 몸으로 받아내고 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이 불편한 시간이야말로 다시 살아가기 위한 통과의례라는 것을.
잠이 오지 않는 늦은 밤, 베란다 창가에 서서 차가운 도로를 바라보았다. 도로를 밝혀주는 가로등 아래로 바람에 떨어지는 낙엽들이 한 장의 장면처럼 흩날리고 있었다.
정적 속에서도 세상은 여전히 움직이고 있었다. 아내가 있는 방 쪽에서 들려오는 물소리와 가벼운 기침 소리가 낯설지 않게 들렸다.
오늘은 몸이 고되고 마음도 무거웠지만, 마음 한켠은 고요했다. 버텨낸다는 건 단지 견디는 일이 아니라, 자신을 조금씩 다독이며 다시 앞으로 나아가는 일이라는 걸 다시금 느꼈다.
그래도 오늘의 긴 밤이 그리 두렵지 않았다. 이 불편함은 우리 부부가 함께 오래도록 함께 하기 위해 지나가는 또 하나의 회복의 밤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