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1.11월의 첫 칸에도 별 하나를 그릴수 있기를

편도암으로 인한 항암과 방사선 치료 후 퇴원 69일차의 기록

by 마부자


어젯밤, 지난 8월 퇴원이후 처음으로 새벽에 단 한 번도 깨지 않고 잠을 잘 수 있었다. 단지 한밤중에 화장실에 가지 않았을 뿐인데 나에게는 그 일이 무척 특별하게 느껴졌다.


몸이 회복되고 있다는 가장 명확한 증거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늘 입안이 마르고 목이 타서 새벽에 눈을 떴던 나였다. 의사는 퇴원할 때 “입이 건조하지 않게 물을 자주 마셔야 한다”고 당부했었다.


그래서 오히려 하루 물 섭취량을 더 늘려야 했는데도 불구하고 깊은 잠을 이룰 수 있었다는 건 분명 회복의 신호였다.작은 목의 혹에서 시작해 죽음의 그림자를 떠올리며 두려움과 싸워야 했던 지난 시간들.

pocket-watch-3156771_1280.jpg?type=w1 사진출처: 픽사베이

그 끝이 어디인지도 모른 채

지루하고 무겁게 흘러가던 나날이었다.


그런데 오늘 새벽, 아무 일도 없이 맞이한 평온한 아침이 이렇게 벅찬 감동으로 다가올 줄은 몰랐다. 감사한 마음으로 잠시 눈을 감고 짧은 명상을 했다.


명상을 마친 뒤 창문을 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6시 무렵이면 동편 아파트 너머로 해가 올라왔는데, 오늘은 7시가 다 되어도 햇살이 보이지 않았다.


계절이 확실히 바뀌었음을 시간의 흐름이 또 한 계단 내려왔음을 느꼈다. 마치 내 몸이 천천히 변화하며 회복되어 가는 모습처럼 하늘 또한 조용히 변화를 품고 있었다.


어제는 검진 일정으로 하루종일 블로그 확인을 하지 못했다. 그래서 블벗님들의 소식에 댓글 하나 달지 못했고, 내 글에 찾아와 마음을 남겨주신 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전하지도 못했다.


늘 내 글을 제일 먼저 읽고 조언과 위로를 건네주시는 별꽃님과 정향님이 어제 전화 통화를 하셨다는 글을 보았다. 글로 이어진 인연이 목소리로 닿는 순간, 어떤 기분일까.

paper-3061485_1280.jpg?type=w1 사진출처: 픽사베이

서로의 문장에 마음을 담아온 사람들이,

이제는 말로 마음을 건네는 그 순간은 얼마나 따뜻할까.


인연이란 참 신비하다. 계획하지 않아도, 그런 인연이 어딘가에서 조용히 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을 것이란 희망을 가지고 오늘 하루를 보내기로 했다.


블벗님들의 이야기를 읽고 글을 쓰느라 오전이 훌쩍 지나갔다. 문득 몸을 움직여야겠다는 생각에 운동복을 갈아입고 현관을 나섰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손끝이 시릴 정도로 차갑던 바람이 이제는 거의 느껴지지 않았고, 대신 부드러운 햇살이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늦가을의 햇살은 여름의 그것과는 조금 다른 느낌으로 내게 다가왔다.


연꽃습지를 지나 금호강변을 걸었다. 이미 가을의 막바지 풍경이 강가에 고스란히 내려앉아 있었다. 누렇게 마른 연잎줄기는 부러져 바닥에 고개를 쳐박고 있었고, 하늘빛은 한결 투명해져 있었다.

forest-4046876_1280.jpg?type=w1 사진출처: 픽사베이

그렇게 8km, 11,000보를 걸은 뒤 천천히 집으로 향했다.


들어오는 길에 아내가 어제 “날이 추워지니 비지찌개가 먹고 싶다”고 말했던 게 떠올랐다. 마침 근처에 두부를 직접 만드는 가게가 있어서 들러 콩비지를 부탁했다.


그러자 주인아주머니가 작은 주먹만 한 회색빛 봉지를 내밀었다. 순간 고개가 갸웃해졌다. 내가 알고 있던 비지는 두부를 만들고 남은 하얀 찌꺼기였는데, 이건 색도 다르고 냄새도 조금 달랐다.


“이건 일반 콩비지가 아니라 발효시킨 거예요.”


아주머니의 설명이 이어졌다. 일반 콩비지는 금세 상해서 요즘은 두부기계를 청소할 때마다 버린다며 대신 발효시켜서 오래 두고 먹을 수 있도록 만든 것이라고 했다.


가격은 작은 봉지 하나에 삼천 원. 건강에는 좋을 것 같았지만, 순간 아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발효라는 단어에서 청국장의 진한 향이 연상되었고, 그건 분명 아내의 취향이 아닐 터였다.


얼마전에 시장에서 두부를 사고 비지는 그냥 공짜로 얻어오기도 했던 기억이 났다. 비록 시장은 아니지만 주먹만 한 봉지 하나가 삼천 원이면 그 작은 봉지로는 아내와 나 그리고 막내까지 셋이 먹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다섯 봉지는 사야 배가 찰 텐데, 그리고 김치에 고기까지 넣으면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저녁이 될 게 뻔했다. 결국 웃으며 “다음에 다시 올게요”라고 말하고 발길을 돌렸다.


검진을 앞두고 며칠간 제대로 먹지 못했던 터라 오늘은 스스로에게 작은 보상을 해주 듯 맘껏 점심을 먹었다. 물론 칼로리를 조절한 식단에 야채와 두부가 전부이긴 했지만 맘껏이라는 단어가 주는 작은 행복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따뜻한 커피 한잔과 함께 책상에 앉았다. 습관처럼 탁상 위 달력을 펼쳐 운동기록을 표시했다. 붉은 펜으로 그려진 별들이 날짜를 따라 가지런히 박혀 있었다.


운동을 마칠 때마다 하나씩 그려 넣던 그 별들. 처음에는 단순한 표시였지만, 어느새 그것이 하루를 완성하는 의식이 되어 있었다.


10월 1일, 달력의 첫 칸에 별 하나를 그리며 이번 달에는 꼭 목표를 지키겠다고 다짐했었다. 그리고 오늘, 그 다짐이 서른한 개의 붉은 별로 채워져 있었다.

KakaoTalk_20251031_174512384.jpg?type=w1

한 달을 버텨낸 증거이자,

몸과 마음이 조금씩 회복되어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작은 기록이었다.


누군가에겐 그저 별표 몇 개일지 몰라도, 내게는 그 안에 담긴 땀과 의지, 그리고 회복의 시간이 모두 들어 있었다. 오늘의 붉은 별 하나를 마지막으로 찍으며 문득 미소가 지어졌다.


달력 위의 붉은 점들이 마치 나를 응원하는 등불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조용히 다짐했다.


이제 곧 11월이 시작된다.

새 달력의 첫 칸에도 다시 별 하나를 그릴 수 있기를.

그 별이 내 삶의 또 다른 희망이 되기를.





작가의 이전글07.31.나는 다시 살아갈 계절을 준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