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도암으로 인한 항암과 방사선 치료 후 퇴원 77일차의 기록
오랜만에 햇살이 스며드는 아침이었다. 서재 창으로 들어오는 빛이 아닌 동편 아파트 너머에서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며 하루를 시작했다.
맑게 갠 하늘만으로도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듯했다. 오늘은 아내와 함께 울산으로 여행 아닌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특별한 인연으로 맺어진 형님과의 점심 약속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형님과의 인연은 작년까지 다녔던 회사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울산의 한 대기업에 근무하던 형님은 당시 내가 담당하던 프로젝트의 핵심 실무자였다.
그 회사에는 이미 오랜 거래처가 있었지만, 우리 회사가 새로운 제품으로 입찰에 참여하면서 경쟁이 시작되었다.
수많은 노력과 영업을 통해 다행히 1차 협상에서 우리 제품이 선정되었지만, 아직 검증되지 않은 우리 회사의 제품에 대한 고객의 의심과 견제의 시선도 함께 따라왔다.
실무지안 형님은 당연히 나와 우리 제품을 의심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거둘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 신뢰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때부터 나는 매일같이 울산의 공장을 찾았다. 기술팀에 맡겨도 될 일이었지만, 직접 시운전과 테스트 과정을 함께하며 모든 결과를 직접 보고했다.
하루도 빠짐없이 현장에 서서 형님과 함께 샘플을 검사하고, 작은 성능 변화에도 함께 기뻐했다. 그렇게 두 달이 지나자 형님과 직원들의 표정이 서서히 달라졌다.
의심은 이해로 바뀌었고
낯섦은 신뢰로 바뀌었다.
결국 1년 가까운 샘플 테스트 결과 끝에 1차 프로젝트를 우리는 최종 수주에 성공했다.
일은 그렇게 끝났지만, 인연은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서로를 부장님이라 부르던 호칭은 어느새 형님과 동생으로 바뀌었다.
퇴사 후에도 연락은 이어졌고 형님은 내 투병 소식을 전해 듣고 누구보다 먼저 마음을 전해왔다. 말보다는 행동으로 형식보다는 진심으로 전해진 그 마음이 오래 남았다.
오늘 울산으로 향하는 길에서 아내가 조용히 말했다.
“당신, 오늘 표정이 참 편해 보이네.”
그 말이 참 고마웠다.
오랜만에 마음이 목적지가 된
여행의 시작이었다.
고속도로를 지나 울산이 가까워지자 예전의 기억들이 하나둘 떠올랐다. 땀으로 젖은 작업복, 그리고 처음 형님이 미소를 지었던 그날의 얼굴까지.
오늘 다시 마주할 그 자리에는 거래도 경쟁도 없고, 오직 서로의 시간을 함께 견뎌온 정만 남아 있었다.
약속 장소에는 조금 일찍 도착했다. 식당 주변을 천천히 걸으며 아내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늦가을의 바람은 여전히 차가웠지만, 햇살은 부드럽게 우리의 머리위로 빛을 뿌리고 있었다. 잠시 뒤 울린 전화벨 소리에 반가운 웃음이 번졌다.
1년 만의 재회였다.
그동안은 둘이서만 만났던 자리지만 오늘은 처음으로 부부가 함께했다. 처음엔 서로 낯설고 어색했다.
형수님은 조심스럽게 미소를 지었고, 아내 역시 긴장한 듯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그 어색함은 오래가지 않았다. 몇 마디의 안부 인사와 지난 이야기가 오가자, 금세 웃음이 섞인 대화로 바뀌었다.
“후배와 제수씨 몸보신 좀 시켜주야지.”
형님은 늘 그렇듯 너그럽고 다정한 말투로 소고기집으로 안내했다. 오랜 단골집이라며 자신 있게 안내한 식당의 불판 위에는 곧 붉은 고기가 가지런히 올랐다.
예전 같으면 이런 날엔 참치회집에서 소주잔을 기울이며 늦은 밤까지 이야기를 나눴겠지만, 오늘의 식사는 그 시절과는 조금 달랐다.
술 한잔 없이도 불판 위에서 익어가는 고기의 향과 따뜻한 사람들 사이의 온기만으로 충분히 취할 수 있는 자리였다.
식사를 마친 후, 인근 커피숍으로 자리를 옮겼다. 커피 한잔을 사이에 두고 나눈 대화의 대부분은 내가 떠난 이후의 회사 이야기였다.
형님은 웃으며 말했다.
“네가 없으니 답답하고 영 성능이 별로야,
이제는 너희 회사 제품은 설치도 안 하려 해.”
농담처럼 던진 말이었지만 그 안에는 따뜻한 애정이 담겨 있었다.
그 한마디에 감사한 마음과 함께했던 시간의 의미가, 그때 흘렸던 땀과 노력이 헛되지 않았음을 느낄 수 있었다.오랜만에 마음껏 웃고, 그 웃음 속에서 지난 세월의 무게가 조금은 가벼워지는 시간이었다.
형님과 형수님은 끝까지 우리를 배웅하며 다음에는 꼭 대구로 가겠다고 약속했다.
마지막 인사 대신 서로를 힘껏 끌어안았다.
말보다 긴 포옹이었다.
“이 인연, 꼭 오래 이어가자.”
형님의 말이 바람결에 길게 남았다.
이번 만남은 단순한 점심이 아니었다. 서로의 삶을 통과해온 신뢰와 정이 다시 이어지는 순간이었다. 그 믿음이 오늘의 햇살처럼 따뜻하게 마음을 덮었다.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사람, 그 한 사람만으로도 인생은 충분히 따뜻해질 수 있다는 걸 새삼 느꼈다.
식당을 나서며 우리는 이번 여행의 두 번째 행선지인 포항으로 향했다. 저녁에는 아들과의 약속이 기다리고 있었다.
낯선 도시의 하늘 아래서, 오늘 하루는 오랜 인연과 새로운 기다림으로 완성되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