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1. 1년 중 1이 가장 많은 날의
또 다른의미

편도암으로 인한 항암과 방사선 치료 후 퇴원 80일차의 기록

by 마부자


오늘따라 유난히 차갑고 어둠이 완전히 걷히지 않은 창밖의 하늘은 아직 어두웠지만, 저 멀리 동편에서 희미하게 피어오르는 빛이 오늘 하루의 시작을 알리고 있었다.


손끝이 시려워 베란다 창문을 반쯤 닫아두고 짧은 명상을 마친 뒤, 따뜻한 차 한 잔을 손에 쥐고 책상 앞에 앉았다.


생각을 위한 글을 쓰기 위해 다시 읽는 한 권의 책, <그릿>의 마지막 책장을 넘기며 오늘은 ‘결의’에 대한 생각을 글로 남겼다.


결의라는 글을 적기전에 순간 결심이라는 단어에 대한 생각을 적었던 글이 떠올랐고, 덕분에 지난 7월 투병생활을 하며 적은 글을 다시 읽어보는 계기가 되었다.


읽었던 책을 다시 펼치며 그 안에 그은 밑줄과 짧은 메모를 다시 읽는 것과는 느낌이 달랐다. 왠지 다른 사람의 글을 읽는 듯한 느낌이랄까.


생각을 적고 글을 쓰고 다시 책을 펼쳐 독서를 시작했다. 그렇게 오전은 어제부터 읽기 시작한 새로운 책 한권의 마지막을 책장을 넘겼다.


운동을 나가기 전 창밖을 보니 제법 바람이 불고, 거리에 지나가는 사람들의 옷차림을 보니 아직은 추위가 가시지 않은 듯 했다.


결국 오늘도 자전거 페달에 발을 올렸다. OCN 영화채널을 켜고 페달을 밟고 있는데, 문득 화면 하단에 작은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올해 1이 가장 많이 들어간 날에 보는 1편의 감동, 그리고 오늘 영화는 대부분 시리즈의 1편을 방송해준다는 내용이었다.


참! 누구의 아이디어 인지 정말 참신하고 신선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운동을 마치고 책상위의 달력 속에서 숫자 1이 네 번이나 반복되는 날, 11월 11일의 의미를 좀 더 깊게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세상은 이 날을 ‘빼빼로데이’라 부르며 달콤함으로 기억하지만, 나에겐 오늘이 조금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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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채널 OCN의 어느 누군가의 생각처럼 1이라는 숫자는 시작을 뜻한다.

무언가의 첫걸음, 새로운 방향으로의 출발.


그 단순한 형태 안에는 삶을 다시 시작하는 의지와 초심으로 돌아가라는 신호가 담겨 있는 듯했다.


문득 이승철의 노래 ‘아마추어’를 떠올렸다.

“우리는 세상이란 무대에서 모두가 같은 아마추어야.” 그 가사처럼 인생이란 무대 위에서 나는 늘 미숙하고 서툰 초보였다.


그러나 나만의 리듬으로, 나만의 시간으로 살아내며 오늘까지 왔다.


요즘 내게 처음이란 단어는 유난히 자주 떠오른다. 52년을 살아오며 인생의 단맛과 쓴맛을 다 봤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나는 여전히 수많은 첫경험 속에 있다.


작년 11월, 27년간 몸담았던 직장을 떠나며 처음으로 백수라는 이름을 달았다. 그리고 올해 편도암 진단을 받으며 또 하나의 처음을 맞았다.


병명 앞에서는 그 어떤 경력도, 그 어떤 자신감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때부터 나는 완전히 다른 인생의 무대에 서 있었다.


처음으로 환자가 되어, 처음으로 내 몸의 연약함을 깊이 들여다보았고, 처음으로 하루를 살아냈다는 말의 무게를 온몸으로 느꼈다.


항암치료와 방사선 치료가 동시에 진행되던 시기,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처음을 경험했다.


처음 느껴보는 입안의 통증, 처음 겪는 미각의 상실, 처음으로 생각했던 죽음도 있었지만 그 고통 속에서도 낯설지 않은 감정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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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살고 싶다는 본능이었다.


살기 위해 견디고, 견디기 위해 다짐했던 그 수많은 아침들 속에서 나는 처음의 의지를 다시 배웠다.


이제 퇴원한 지 80일. 몸은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지만, 강변길을 걷고,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다시 체력을 쌓아가고 있다.


기억이라는 것은 늘 가장 최근의 장면부터 떠오른다. 그래서 내 기억의 앨범은 여전히 고통의 색으로 덮여 있다. 하지만 오래된 기억 속에는 다른 첫경험들도 있었다.


첫사랑, 첫 월급, 첫 집, 첫 여행, 첫 차. 그리고 첫 아이의 울음소리.


그 모든 ‘처음’들이 나를 지금 이 자리로 이끌었다. 이제는 그 기억들이 고통의 색을 덮고 새로운 희망의 색으로 덧입혀지기를 바란다.


숫자 1이 이렇게 반복되는 날, 빼빼로데이가 아닌 첫번째라는 의미를 떠올리게 만든 OCN 채널 속 문장과의 만남이 어쩌면 우연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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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나에게 또 한 번의 시작을 준비하라고 말하는 것 같다.


나는 다시 시작한다.

이제는 고통의 첫경험이 아니라, 회복의 첫경험을 만들어갈 것이다.

다시 하나에서 시작하는 인생, 그 ‘1’의 의미를 마음 깊이 새기며 오늘을 조용히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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