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2.막내의 수능,
후회하지 않도록 보고 와요.

편도암으로 인한 항암과 방사선 치료 후 퇴원 81일차의 기록

by 마부자


아침 공기가 한층 더 차가워졌다. 짧은 명상을 하는 시간에도 열린 창문 틈으로 차가운 공기가 밀려들어왔다.


바람에는 초겨울의 냄새가 실려 있었다. 동편에서 떠오르는 햇살은 여전히 부드러웠지만 체감 공기는 이미 겨울의 문턱을 넘은 듯했다.


새로운 책 한권을 꺼내 그 안에서 ‘격차’라는 단어에 대한 생각을 정리했다. 독서를 마치고 운동을 나가려 했지만 어제 저녁부터 목 감기 증상이 있는 듯했다.


지난 주말 포항에서 비를 좀 맞고 걸으며 살짝 추위를 느꼈었는데 그 때문인 듯했다. 결국 오늘도 야외 운동은 잠시 접어두고 천천히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몸을 데웠다.


어제보다 속도를 조금 낮췄지만 몸의 감각은 오히려 더 선명했다. 반복되는 루틴이 지루하기보다는 오히려 내 일상에 안정감을 주는 리듬이 되어가고 있었다.


운동을 마친 뒤 집 앞의 마트로 향했다. 내일 수능을 치르는 막내의 도시락 재료를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당연히 수능날에 학교에서 점심을 주는 줄 알았던 나는 어제 막내가 시험날 도시락을 싸가야 한다는 말에 바보같이 “왜?”하고 물어보았다.


조금은 황당하게 나를 쳐다 보는 막내의 눈빛을 보며 그제야 깨달았다. 시험장에 들어가면 교실밖으로 못 나온다는 것을.


첫째와 둘째의 수능에는 아내가 도시락을 싸주었기 때문이라는 혼자만의 위안을 삼았지만, 고3 수험생을 둔 아버지로서 부끄러운 순간이었다.


간단히 장을 보고 돌아오는 길, 떡집 앞을 지나게 되었다. 미신을 믿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동안 고생한 막내를 위해 찹쌀떡을 조금 사서 들어왔다.


며칠 전 막내에게 물어보니 요즘 아이들은 캐릭터 스티커나 이모티콘을 선물한다고 한다. 세대 마다 다른 수능의 풍경속에서 그래도 난 고전의 방식으로 막내에게 힘을 주기로 했다.


요즘 아이들이 좋아하는 간식은 아니지만, 시험 날엔 그게 꼭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짧은 장보기 사이에 예전 어머니가 싸주던 도시락이 떠올랐다.


내 나이쯤 되면 생각나는 도시락들의 모습이 있다. 줄줄이 이야기하자면 끝이 없는 네버엔딩 스토리일 정도로 긴 추억을 머릿속으로 그리며 미소 짓는 순간이었다.


오후에는 서재에 앉아 무라카미 하루키의 새 책을 펼쳤다. 첫 장을 읽자마자 그의 문체에서 오래된 친구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은 처음 읽는다. 내가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작가를 알게 된 것은 그의 책이 아닌 임경선작가를 통해서였다.


임경선작가의 작품을 읽고 내가 글을 쓴다면 반드시 그녀처럼 글을 쓰겠다고 수없이 다짐을 했었다.


그런 그녀는 자칭 무라카미 하루키 대한민국 팬클럽회장이라고 말한다. 많이 읽지 않아도 괜찮았다. 좋아하는 작가가 좋아하는 책이 거기 있고, 내가 다시 책을 펼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묘한 기분이 생겨났다.


저녁에는 일찍 스터디카페에서 돌아온 막내와 함께 식탁에 앉았다. 오랜만에 셋이 함께 앉은 저녁상이었다.


“내일은 몇 시까지 가야 하니?”라고 묻자

막내는 짧게 “7시 반쯤이면 돼요”라고 대답했다.


그 말 속에는 긴장보다는 담담함이 묻어 있었다.

다행히 다니는 학교에서 시험을 보게 되어 이동에 대한 부담은 덜하다고 했다.


“준비 잘 했으니 걱정하지 마요.”

오히려 막내가 나를 위로했다.


그 한마디에 마음이 순간 묘하게 흔들렸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저 시험 보는 날이 다가오고 있구나 정도로만 여겼는데, 막상 내일이라고 생각하니 내가 더 긴장이 되었다.


이미 두 아이가 수능의 과정을 지나왔지만, 이상하게 이번엔 다른 감정이 일었다. 마지막 아이의 수능이라 그런지, 그 시간이 가진 의미가 한층 크게 다가왔다.


아이의 미래가 달린 시험이라는 무게는 언제나 같지만, 그 긴장감은 매번 새로웠다. 부모의 마음은 결코 익숙해질 수 없는 일임을 다시 느꼈다.


아내도 그런 내 마음을 아는 듯,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내일이면 막둥이도 한 고비 넘기는 거네. 후회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고 와요.”


아내는 늘 그렇듯 짧지만 단단한 말로 마음을 전했다. 그 말 속에는 격려와 믿음, 그리고 긴 시간 동안 함께 지켜봐 온 부모의 사랑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나는 굳이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아내의 말이 이미 충분했고 그보다 더 적확한 위로는 없을 것 같았다.


식사를 마친 후, 막내는 내일을 위해 일찍 방으로 들어갔다. 방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자, 집안에는 오랜만에 고요가 내려앉았다.


나도 감기 기운이 올라오는 몸을 위해 약을 먹고 하루를 일찍 정리했다. 아내는 도시락 준비를 위해 주방 불빛 아래서 재료를 챙겼다.


잠들기 전 책상 앞에 앉아 하루를 정리하며 창밖으로 스며드는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계절의 냄새가 달라지고 있었다.


이렇게 또 한 계절이 가고, 아이는 조금 더 자라고, 부모의 마음은 다시 한 번 성장의 의미를 배운다.





이전 11화11.11. 1년 중 1이 가장 많은 날의 또 다른의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