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4.아이에게 잠시 멈춤의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편도암으로 인한 항암과 방사선 치료 후 퇴원 83일차의 기록

by 마부자


겨울이 다가온 듯 새벽의 공기는 차갑게 다가온다. 어제 하루의 긴장이 아직 몸에 남아 있기는 했지만 생각보다 가벼운 아침공기를 마시며 명상을 했다.


한 해 동안 가장 크게 걱정했던 일이 마침내 지나갔다는 사실이 주는 안도감 덕분일 것이다. 시험이 끝난 뒤 교문을 나서는 아이들의 얼굴이 잠시 떠올랐다.


밝아 보이는 듯하다가도 금세 허탈한 표정이 스치고, 다시 해방감이 어른거리는 그 복잡한 표정 속에서 아이들이 얼마나 많은 시간을 버티며 지냈을지 알 수 있었다.


막내도 비슷한 얼굴로 걸어 나왔고, 그 표정속에 어떤 의미가 담겨있을지 알지 못한다. 아니 경험했지만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한가지 확실한 것은 지금 이 순간은 내가 부모로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현실이다.


대신 아파줄 수도, 대신 채워줄 수도 없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마음 한쪽은 늘 무언가를 대신해주고 싶었지만 어제 나는 아이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paper-figures-6652452_1280.jpg?type=w1

이제 더 이상 아이는 말로 배우지 않게 될 것이다.

경험을 통해 스스로의 세계를 만들어가야 한다.


막내도 내년이면 더 넓은 세계로 걸어갈 것이다. 스스로 선택해야 할 일들이 점점 많아지고 그 선택은 때로는 불안하고 때로는 설렘이 될 것이다.


어떤 선택이 옳고 어떤 선택이 틀렸는지는 지금 아무도 알 수 없다. 선택과 실수, 다시 선택하는 과정 속에서만 배울 수 있는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저 곁에서 바라보며 기다려야 한다. 말보다 기다림이 더 큰 힘이 될 때가 있다는 걸, 나 역시 늦게서야 깨닫기 시작했다.


어제 아이들의 얼굴을 보며 마음은 복잡했지만, 동시에 조금 더 내려놓아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이의 세계는 결국 아이의 것이다.


나는 그 옆에서 조용히, 흔들리지 않게 버티는 기둥처럼 서 있기만 하면 된다.


오늘은 어제의 길었던 하루를 천천히 정리하며 보낼 생각이다. 큰 일이 지나가고 나면 늘 일상의 소중함이 더 뚜렷해지는 순간이 찾아오곤 한다.

%EC%9D%B8%EA%B0%84%EA%B4%80%EA%B3%84%EB%A1%A0_(29).png?type=w1

오늘이 바로 그런 날이다.


시험이 끝난 막내가 오늘부터 오후 1시에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불과 며칠 전만 해도 집에 들어오면 바로 책상 앞에 앉거나 스터디카페로 향했을 아이였다.


오늘은 학교에서 점심은 먹었다고 말하곤 곧장 방으로 들어가 조용히 문을 닫았다. 그 뒷모습에서 설명하기 어려운 묵직함이 느껴졌지만, 그 순간 문을 열어보지는 않았다.


아이가 홀로 잠시 머물러야 할 시간이 있다고 생각했고, 억지로 끌어내고 싶지 않았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 막내를 불렀다. 방문이 천천히 열리더니 막내가 빼꼼히 얼굴을 내밀었다. 나는 아이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심심하지? 갑자기 시간이 비니까 당장 뭘 해야 할지 모르겠고, 지금 이렇게 멍하게 있는 게 맞나 싶지?”


막내는 방에서 나오며 피식 웃었다.

“어떻게 아셨어요? 사실 시험이 끝난 것 같은 기분도 안 들고... 왠지 지금도 책을 다시 펴야 할 것 같아요.”


그 말 속에 아이가 올 1년 동안 얼마나 긴장 속에서 버텼는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시험이 끝났는데도 몸과 마음이 여전히 공부하던 리듬에 묶여 있는 듯했다.


내가 치료를 끝내고도 한동안 병원에 있는 듯한 느낌이 사라지지 않았던 그 시절이 떠올랐다. 몸은 병원에서 나왔지만 마음은 아직 남아 있는 듯한 어색함.


막내에게 수능 시험이란 것도 결국 비슷한 것일지 모른다. 서재로 들어와 옆에 앉으며 묘한 미소를 짓는 아이에게 말해주었다.

owl-845023_1280.jpg?type=w1

“그럴 수 있어. 하지만 지금은 그냥 조금 멍해도 괜찮아. 아무것도 안 해도 괜찮고.”


짧은 대화였지만 나는 막내와의 대화에서 깊은 동질감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모든 것을 다해 힘을 쏟았던 순간이 해결되고 나면 밀려오는 허탈한 감정일 것이다.


말을 하면서도 나 스스로에게도 들려주는 말 같았다.

회복에는 방식이 있고, 그 방식은 때로는 멈춰 서는 데서 시작된다.


아이에게도 지금은 그 멈춤의 시간이 필요한 것일지 모른다.

%EB%A9%98%ED%83%88%EC%9D%98%EC%97%B0%EA%B8%88%EC%88%A0_(24).png?type=w1

막내는 고개를 끄덕이며 거실 소파 끝에 살짝 앉았다. 여전히 어색한 표정이었지만, 그 표정 속에서 아이가 천천히 긴장감을 내려놓는 순간이 드러나 보였다.


잠시 뒤 언제 그랬냐는 듯이 친구들과 약속이 생겼다며 뛰쳐 나가는 아이의 모습을 보며 불안하지만 조금씩 그렇게 성장하는 것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시험이 끝났다는 사실을 마음이 완전히 이해하기까지, 아마 며칠은 더 걸릴 것이다.

오늘의 이 작은 대화가 그 시작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이전 13화11.13.아이들의 표정 속에 인생이 담겨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