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7.막내에게는 다 계획이 있었다.

편도암으로 인한 항암과 방사선 치료 후 퇴원 86일차의 기록

by 마부자


이른 새벽 어둠 속에 초겨울의 추위가 깊게 스며들어 있었다. 밤새 얼음장 같은 바람이 창문틈으로 밀려와 베란다는 영하의 공기처럼 차갑게 식어 있었고, 바닥을 디딜 때마다 발끝이 시렸다.


기침으로 건조해진 목을 도라지생강차 한 잔으로 적시고 책상에 앉아 ‘한계’라는 단어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 나갔다.


며칠 전 블벗 ‘별꽃’님께서 보내주신 책이 또 도착했다. 이전에 보내주신 책에 대한 답례도 하지 못했는데 다시 마음을 보내주셨다.


책을 정리하는 김에 나눔하신다고 했지만, 아직 이사 계획을 밝히지 않으신 걸 보면 고전을 좋아하는 나를 떠올리며 챙겨주신 마음이 더 크게 느껴졌다.


함께 보내주신 히말라야 솔트와 홍차를 꺼내 보며, 세상의 소금 같은 글을 쓰고 은은한 향과 달근한 맛을 지닌 사람으로 살라는 의미처럼 다가왔다.


여러 권의 책 중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지난번에 받은 <돼지가 한 마리도 죽지 않던 날>의 후속 이야기인 <하늘 어딘가에 우리 집을 묻던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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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작스레 추워진 날씨와 감기가 핑계가 되어 이번 주만큼은 운동을 쉬고 책과 함께 지내기로 했다.


그리고 그 첫날, 첫 책으로 아프지만 사람을 자라게 하는 성장의 이야기를 선택했다.


읽다 보면 반복되는 한 가지 정서가 있다. 헤어짐과 남겨짐이었다. 먼저 떠난 두 형과 삼촌, 그리고 결국 아버지마저 떠나게 되며 소년 곁은 점점 비어간다.


황소 솔로몬, 젖소 데이지, 고양이 사라까지 곁을 지키던 존재들은 하나둘 떠나고 남은 자리는 허전하고 차갑게 느껴진다.


하지만 떠난 자리를 바라보며 또 언젠가 떠날 사람들을 생각해야 한다는 사실이 소년을 더욱 힘들게 한다.


떠나는 쪽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일부가 되고, 남겨진 이들은 그 하늘을 올려다보며 다시 뿌리내린다.


떠나보낸 사람들은 땅 속에 묻었지만 우리가 떠나보낸 이들은 땅 아래 있지 않고, 우리 위에 있다는 의미로 다가왔다.


그 의미를 곱씹다 보니 <하늘 어딘가에 우리 집을 묻던 날>이라는 제목이 왜 이렇게 따뜻하게 들리는지 알 것 같았다. 이 책의 정서가 제목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책을 덮고 오랫동안 책상 앞에서 눈을 감았다. 소년의 성장을 따라가다 보니 몇 번이나 생각의 걸음을 멈추게 되었다.


소년의 성장은 단번에 어른이 되는 방식이 아니었다. 상실을 견디고 고단함을 버티며 사랑을 주고받는 과정 속에서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단단해지는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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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이 사람에게 가르쳐 주는

가장 오래된 방식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전 내내 책을 읽고 간단히 점심을 먹은 뒤 오후 1시쯤 막내가 하교해 돌아왔다. 이번 주부터 겨울방학 전까지는 오전 수업만 하고 일찍 귀가한다고 했다.


아직 결과는 나와 봐야 알겠지만 대학을 간다는 가정 아래 생각해 보면 지금이 막내에게 가장 한가로운 시간일지도 모른다.


지난주부터 막내는 보고 싶었지만 참았던 드라마들을 몰아보기 시작했다. 주말 내내 사랑의 불시착을 전편 정주행했고, 오늘은 태양의 후예를 보기 시작했다.


소파에 앉아 과일을 나눠 먹으며 앞으로 세 달을 어떻게 보낼 생각인지 물었다.


막내는 친구들과 일본 여행을 가고 싶어 계획을 세우고 있고, 경비 마련을 위해 아르바이트와 여러 방법을 알아보는 중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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녀석에게는 다 계획이 있었구나! 라는 하는 짧은 혼잣말을 하며 막내의 시간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조용히 몸을 일으켜 서재로 돌아왔다.


드라마 삼매경에 빠져서 실실 웃는 모습이 천진난만하게 느껴졌지만, 한편으론 이번 달까지는 아무 생각 없이 쉬게 두자고 걱정하던 내 모습이 무색해지는 순간이기도 했다.


혼자서 차근차근 준비해가는 말투에서 생각보다 훨씬 단단하게 크고 있다는 걸 느꼈다.


오전에 읽은 책의 서평을 정리하며 오늘 하루를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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