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도암으로 인한 항암과 방사선 치료 후 퇴원 87일차의 기록
아침 공기에서 한겨울의 냉기가 스며들었다. 늦가을인데도 기온이 영하까지 떨어졌고, 창문 사이로 스며드는 바람은 날을 세운 듯 차가웠다.
따뜻한 차 한 잔을 손에 쥐고 책상 앞에 앉아 ‘비판’이라는 단어에 대한 생각을 적으며 하루를 시작했다.
아내의 출근 전 아침 뉴스에서 아나운서가 말했다.
“패션이나 눈치 보지 말고 오늘은 따뜻하게 입으실 것을 권해드립니다”
소파에 앉아 듣던 아내가 “그렇다면 답은 롱패딩이지” 하며 장롱 문을 열었다. 겨울 옷을 꺼내는 일이 조금 빠른 것 같았지만, 체감온도가 영하 5도까지 내려간다니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현관을 나서며 너무 따뜻하다며 웃던 아내의 뒷모습에 잠시 추위를 잊을 만큼 묘한 온기가 돌아왔다.
막내가 등교를 하고, 아내가 꺼낸 패딩 덕분에 자연스럽게 옷장 정리를 시작했다.
올봄에 ‘내년 겨울에나 꺼내겠지’ 하며 깊숙이 넣어두었던 점퍼와 패딩을 다시 꺼내 옷걸이에 걸었다.
그러고는 한여름 내 투병의 시간과 함께했던 반팔 티셔츠들을 접어 넣는데 마음이 조금 요동쳤다.
해마다 계절이 바뀌면 옷을 정리하는 이 단순한 행위가 늘 시간의 빠름을 환기시키곤 했지만 올해는 그 너머의 감정이 밀려왔다.
요양병원과 삼성병원을 오가던 그 여름, 거의 매일 입다시피 했던 낡은 반팔 티셔츠와 청바지를 접어 넣을 때에는 유독 마음이 조용해졌다.
손끝으로 옷감을 만질 때마다
그 시간들이 고스란히 되살아났기 때문이다.
작년 겨울, 회사를 퇴사하고 옷을 정리하던 날의 나를 떠올렸다. 그때 나는 분명히 믿고 있었다. 다음 여름이 오면 새로운 시작을 위해 더 단단히 움직이고 있을 거라고.
그러나 현실의 여름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찾아왔고, 그 계절은 기나긴 고통과 회복의 시간으로 채워졌다. 다시 옷장 속 깊은 곳으로 넣는 반팔 티셔츠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다음에 이 옷들을 꺼낼 때 나는 어떤 표정일까.
어떤 몸의 상태로 어떤 마음의 결로 이 옷들을 다시 마주하게 될까. 올해는 투병의 기록으로 접어 넣었지만 내년엔 완치라는 이름으로 꺼낼 수 있기를 바란다.
그 바람 하나만으로도 오늘 옷장 속 계절들은 조금 다른 의미로 정리되었다.
아직 감기가 완전히 낫지 않은 몸을 위해 운동을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땀을 내는 일보다 먼저 회복을 챙겨야 하는 내 몸의 사정을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제에 이어 오늘도 조용히 책상 앞에 머물며 독서에 집중하는 시간을 가졌다.
오늘 선택한 책은 <절제의 성공학>. 제목만 보면 흔히 떠올리는 절제 즉, 욕망을 다스리고 행동을 조절하는 마음의 싸움을 생각하기 쉽지만, 이 책이 말하는 절제는 조금 다르다.
바로 음식에 대한 절제, 다시 말해 ‘입’이라는 작은 문으로 들어오는 것들이 우리의 몸과 인생 전체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에 대해 깊이 다룬다.
페이지를 넘길수록, 내가 지금까지 너무 무심히 반복해왔던 먹는 행위에 대해 되돌아보게 되었다.
건강해 보이기 위해, 혹은 기분을 달래기 위해, 때로는 그냥 습관처럼 먹어온 많은 순간들이 떠올랐고, 그 안에 숨어 있는 작은 과잉과 방심도 함께 떠올랐다.
책은 얇았지만, 저자 미즈노 남보쿠의 생각은 결코 얇지 않았다.
음식의 양을 줄이는 단순한 절제가 아니라, 그 절제 속에서 어떻게 기운을 보존하고, 몸의 흐름을 바꾸며, 결국 삶의 방향까지 안정시킬 수 있는가에 대해 깊은 통찰을 건넨다.
몸이 아플 때 비로소 보이는 진실이 있다.
몸이 약해질 때 비로소 들리는 신호가 있다.
그리고 그 신호를 가장 먼저 보내는 곳이 입이라는 것
아내가 더욱 차가워진 저녁바람을 뚫고 들어왔다. 코와 볼이 빨갛게 물들어 있었지만, 롱패딩 덕분에 춥지 않았다며 특유의 해맑은 미소를 지었다.
문틈으로 들어오던 찬 기운도 그 얼굴 하나로 금세 따뜻해지는 듯했다.
셋이 함께 저녁 식탁에 둘러앉아 조용히 하루를 나눴다. 식사를 마친 후 아내는 정기 모임이 있는 볼링장으로 향하고 막내는 소파에 기대어 태양의 후예를 보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집안은 고요했지만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리듬으로 하루를 이어가는 소리가 은근한 온기로 번져왔다.
나는 다시 책상 앞에 앉아 오늘 마무리하지 못한 서평을 정리했다. 책의 마지막 문장을 덮으면서 자연스럽게 오늘 하루의 장면들도 하나둘 정리되기 시작했다.
아침에 갑자기 찾아온 한파는 오래 머문 감기의 기운과 겹쳐 몸을 움츠리게 했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하루 종일 마음을 데우는 순간들이 많았다.
숨조차 뜨겁게 만들던 암과의 싸움,
오늘 다시 배운 절제라는 단어의 묵직함,
추운 날에도 겨울을 미소로 바꿔버린 아내의 미소,
최선을 다하고 콧노래를 흘리며 드라마를 보는 막내.
그 모든 장면에서 올라오는 온기들이 오늘밤의 공기보다 더 뜨겁게 나를 감싸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갑작스러운 한파가 몰아쳤지만, 오늘 내 마음은 단 한순간도 얼지 않았다.
온기라는 것은 거창한 것이 아니라, 결국 이렇게 하루를 함께 버티고 웃어주는 사람들 곁에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지는 것임을 다시 느낀다.
오늘밤은 추울 이유가 없다.
우리 셋이 만들어낸 이 온도만으로도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