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9.수능을 마친 막내의
옷장을 정리하며

편도암으로 인한 항암과 방사선 치료 후 퇴원 88일차의 기록

by 마부자


이제 새벽 공기의 저울은 겨울로 더 기울어가고 있었다. 창문을 조금만 열어도 차가운 바람이 방 안으로 밀려들어와 몸을 움츠리게 했다.


감기가 좀처럼 가라앉지 않고 어젯밤에는 기침이 더 심해졌다. 아침부터 목이 칼칼했고, 오래 기침을 할 때마다 치료 후 남은 약한 부위가 불편하게 반응했다.


결국 오전에 병원에 들러 진료를 받고 왔다. 대기실 의자마다 기침을 하며 콧물을 훌쩍이는 아이들과 함께 차례를 기다리느라 지친 표정의 부모들까지 이미 작은 겨울이 그곳에 먼저 와 있는 듯했다.


나도 그 틈에 앉아 순서를 기다렸다. 조용히 앉아 있으면서도 마음 한편에는 묵직한 감정이 가라앉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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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같으면 감기쯤은 대수롭지 않게 넘겼을 테지만,

지금의 나는 예전의 몸이 아니었다.


다행히 의사는 큰 문제는 아니라며 안심시켜 주었지만, 완치 이전의 감기라는 단어는 어쩐지 때 이른 추위 만큼이나 나의 마음을 더 으슬으슬해지는 기분이었다.


집에 돌아와 잠시 쉬다가 오늘은 막내의 옷장을 정리했다. 오랫동안 보관해둔 학창시절의 교복과 체육복이 가지런히 옷걸이에 걸려 있었다.


막내가 대학을 준비하고 새로운 길을 준비하는 동안, 이 옷들은 조용히 막내와 함께 자리를 지키며 시간을 견디고 있었다.


손에 쥐고 있던 교복에서 야릇한 남자의 냄새가 났다. 이제 어른이 되어가는 막내의 채취가 담겨있는 또렷한 시간의 냄새였다.


정리를 마치고 학교에서 돌아온 막내에게 물었더니 “이제 필요 없어요. 버려도 돼요.”라고 담담하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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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 한마디가 어쩐지 뭉클하게 들렸다.

버려도 되는 옷이 아니라,

버릴 만큼 성장했다는 뜻일 것이다.


옷을 들고 헌 옷 수거함에 넣는 순간, 그저 낡은 천 조각 몇 벌을 버리는 일이 아니라 아이가 지나온 시간을 한 번 더 손끝으로 만져보는 일처럼 느껴졌다.


교복의 무게는 가벼웠지만, 그 안에 담긴 시간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그리고 옷을 가방에서 꺼내는 순간 문득 마음이 멈칫했다.


이 옷들과 함께 3년이라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를 버텨낸 막내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교복은 이미 낡았지만 그 옷이 포개고 쌓아온 시간들은 쉽게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수거함 입구 앞에서 잠시 머뭇거렸다.


아마 어떤 이들이 소중한 추억이 담긴 물건을 오래도록 버리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이 마음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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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건이 아니라 그 안에 묻어 있는

시간과 감정이 우리 손을 붙잡는 것이다.


오늘 교복을 수거함에 조용히 넣는 일은 단순한 정리가 아니라, 아이의 한 계절을 잘 묶어 보내는 의식 같은 순간이었다.


옷을 버리고 들어오니 막내가 옷장 속에서 몇 가지 옷을 더 꺼내놓았다. 상태도 좋고, 내년에입어도 충분할 것 같은데 더 이상 입지 않겠다며 내어놓은 것이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대부분이 작아져서 이제는 몸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작년까지는 멀쩡히 입던 옷들이 올해는 맞지 않을 만큼 아이는 또 한 번 성장해 있었다.


그 가운데 유독 눈에 띄는 후드티와 겨울용 티셔츠가 있었다. 거의 새 옷이나 다름없는 상태였다.


“이것도 버릴 거야?” 하고 묻자,

막내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 인지 기억나지 않지만 분명 돈 주고 사준 옷일 텐데 몇 번 입지도 않은 새 옷을 버린다고 해서 이유를 물으려던 찰나, 막내가 먼저 조용히 말했다.


“예전 여자친구랑 커플티로 샀던 거예요.

헤어지고 나니까 못 입겠어요.....

사실 두 번인가밖에 안 입은 새건데…”


그 말을 들으니 무슨 느낌인지 단번에 이해가 되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고 했지만, 그 옷을 버리기에는 아까움이 컸다. 잠시 뒤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들... 그럼 이거 아빠가 입어도 될까?”

막내는 밝게 웃으며 “그러세요” 하고 흔쾌히 허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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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순간, 못 입겠다는 이유가 담긴 옷이 내겐 따뜻한 선물처럼 느껴졌다. 덕분에 올겨울은 생각보다 더 따뜻하게 날 것 같다.


오늘도 운동을 쉬고 한권의 책을 새로 펼쳐 들었다. 그동안의 읽던 장르와는 조금 다른 결의 책이었다. <침팬지 폴리틱스>라는 책이다.


권력 투쟁의 동물적 기원이라는 부제를 가진 내용으로 오랜 시간 침팬지를 연구한 저자가 인간과 유인원들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과학으로 풀어낸 이야기였다.


아내가 퇴근을 하고 오늘도 서로의 자리에서 하루를 마무리한다. 서재에 들어와 오늘의 하루를 정리하는 시간을 가진다.


병원 대기실에서 나는 예전과 달라진 내 몸을 다시 확인했다. 같은 감기라도 더 조심해야 하고 사람들 사이에 잠시 앉아 있는 동안에도 마음 한켠이 긴장했다.


예전의 나는 몰랐던 방식으로 내 몸을 관리하는 법을 배우고 있고, 그 변화는 불편하면서도 새로운 삶을 받아들이는 또 하나의 성장처럼 느껴졌다.


막내의 옷 정리도 마찬가지였다. 교복을 버리고, 작은 옷들을 내놓고, 헤어진 사람의 흔적이 남은 새 옷까지 정리하는 막내의 모습은 지나온 시간을 접어 두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아이만의 방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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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모습을 보며 나 역시 내 안에 쌓여 있던 두려움과 막연한 불안을 조금씩 정리해야 한다는 마음이 들었다.


병을 겪으며 낡아진 습관과 생각들, 더는 맞지 않는 감정들을 천천히 비워내야만 다음 계절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오늘 하루는 작고 조용했지만, 두 장면이 나에게 말해주는 메시지는 분명했다.


몸은 몸대로 회복의 길을 배우고, 마음은 마음대로 비워내는 법을 배우고 있다는 것.


나는 이렇게 조금씩, 낡은 것을 내려놓고 새로운 계절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는 중이다.





이전 18화11.18.때 이른 한파지만 내 마음은 춥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