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0.나의 노력이 만들어낸
또 하나의 행운

by 마부자


추워진 날씨 속에서 종일 독서를 하며 지냈다. 조금은 서늘하게 맞춰둔 서재의 온도로 서늘했지만, 책상 앞에 앉아 책장을 넘기는 일은 크게 힘들지 않았다.


오히려 약간의 서늘함이 몸에 부담을 주지 않는 적당한 리듬이 되었다.


오랜만에 장시간 독서를 하다 눈이 피곤해져 잠시 고개를 들었을 때, 책장에 한 줄로 정리된 책들을 바라보며 지난 몇 달을 지나온 시간을 다시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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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료의 한가운데에서도 놓지 않았던

읽기라는 습관이 오늘의 나를 버티게 만든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주 병원을 다녀온 것 말고는 바깥 공기를 마시지 못해 중간중간 베란다에 나가 바깥 공기를 들이켰다.


차가운 공기가 얼굴에 닿는 순간 몸이 아직 예전 상태가 아니라는 사실이 선명하게 다가왔다.


책을 오래 읽으면 금방 목이 마르고 마른 기침이 나오는 순간에는 체력이 뚝 떨어지는 것을 유난히 더 느껴졌다.


예전에는 그냥 넘기던 사소한 변화들인데 지금은 작은 신호 하나도 무심히 넘길 수 없다. 그래도 이렇게 조금씩 감각을 확인하며 지나가는 시간이 회복의 과정이라 느낀다.


일찍 귀가를 한 막내가 급히 서재로 들어와 컴퓨터를 쓰겠다며 양해를 구한다. 막내가 아르바이트 면접을 본다고 이력서를 작성해야 한다며.


얼마전 까지만 해도 학교와 시험에 대한 이야기만 하던 아이가 스스로 일을 해보겠다고 이력서를 쓰는 모습이 조금은 낯설었고, 동시에 이상하게 마음을 울렸다.


책상에 앉아 키보드를 두드리며 꼼꼼하게 항목을 채워 넣는 모습은 이제 정말 아이가 성인으로 건너가고 있다는 것을 생각이 아니라 감각으로 느끼게 하는 순간이었다.


면접을 본다는 말에 나는 자연스럽게 복장을 떠올렸다. “정장은 아니어도 깔끔하게는 입어가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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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말했는데 막내가 방에서 나온 순간,

나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위아래 색깔이 똑같은 트레이닝복 바지와 후드 집업이었다. 내 기준으로는 너무 편안했고 면접이라는 단어와는 조금 거리가 있어 보였다.


“그렇게 입고 갈 거야?” 하고 조심스레 물었더니,

막내는 특유의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이 정도면 깔끔한 거 아닌가요?”


그 말투가 또 어찌나 당당하고 자연스러운지, 더 뭐라고 할 말도 없었다.


아마 내가 생각하는 ‘깔끔함’과 아이가 생각하는 ‘깔끔함’은 세대만큼의 거리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시대가 달라지면 옷의 기준도 달라지는 걸까? 잠시 고민했지만 잔소리는 하지 않기로 했다.


처음 면접이라는 걸 보러 가는 아이에게 옷차림으로 마음을 흔들고 싶지 않았다.


설령 복장 때문에 떨어진다 해도 그것 역시 경험이고, 복장 상관없이 합격한다면, 그건 시대를 못 따라간 건 나라는 중요한 교훈을 내게 남길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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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 중 무엇이든 아이에게도, 나에게도

남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면접을 보고 돌아온 막내는 “그냥 뭐, 별거 없던데요. 이력서 드리고 이야기 조금 하다가 연락 준다고 하더라구요.” 하며 웃었다.


그 웃음 속에서 긴장을 견디고 온 노력과 처음 겪는 순간을 스스로 챙겨낸 대견함이 묻어 있었다. 막내의 뒷모습을 바라보는데, 오늘 가장 따뜻했던 장면이 그 순간이었다.


막내가 수능을 마치고 집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요즘 아이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부쩍 많아졌다.


예전 같으면 상상조차 못할 순간들이다. 회사일에 치여 ‘아빠의 시간’은 늘 뒤로 밀려나 있었고, 함께 점심을 먹거나 소파에 나란히 앉아 TV를 보는 일조차 흔치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자연스럽게 아이와 하루의 일부를 나누는 중이다. 그래서인지 막내와의 에피소드가 요즘 일기를 채우게 된다.


아이와 오래 함께 있다 보면 사소한 말다툼도 생기고 잔소리 아닌 잔소리를 하게 되지만, 문득 그런 순간마저도 소중한 기억이 되어 가고 있음을 깨닫는다.


아마도 그동안 내가 갖지 못했던 시간들, 놓쳐버린 순간들의 빈자리를 지금 이렇게 다시 채워가는 중인지도 모른다.


오늘 새벽 ‘행운’이라는 단어에 대해 글을 쓰며 우연이 필연이 되는 과정을 생각했다. 그 문장을 떠올리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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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내가 누리는 이 조용하고 다정한 시간들은

퇴사라는 선택, 투병이라는 시련을 지나오며

결국 놓치지 않고 붙잡아낸

나의 노력들이 만들어낸

또 하나의 행운이 아닐까.


막내와 함께 보내는 이 평범하고 감사한 순간들이, 어쩌면 내가 지금 잘 살아가고 있다는 증거이자 다시 살아가야 할 이유로 자연스럽게 손에 들어온 선물인지도 모른다.


오늘은 그렇게, 아주 조용하지만 충분히 따뜻한 의미로 하루를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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