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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1(금)-도깨비에 홀린듯
지나가 버린 오후 시간

편도암으로 인한 항암과 방사선 치료 후 퇴원 90일차의 기록

by 마부자


추위가 조금 주춤했지만 새벽의 공기는 이제 겨울이라고 부를 만큼 차가웠다. 약의 효과로 인해 한결 가벼워진 몸을 일으켜 짧은 명상으로 하고 책상 앞에 앉았다.


약 2주에 걸쳐 <어나더레벨, 두 갈래 길>의 책을 다시 펼치며 8개의 단어에 대한 나의 생각을 글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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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차, 의식, 신뢰, 한계, 비판, 편향, 행운, 외면>


남은 삶의 의지와 행동사이의 작은 격차를 줄이기 위해 나의 의식을 무의식의 습관에서 깨우는 기술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의 의도를 타인에게 밀어붙이며 신뢰를 쌓아오던 기존의 행동들이 나의 한계임을 깨닫고, 나 스스로에 대한 미래를 위한 긍정의 비판을 해보았다.


그렇게 그동안 나의 편향된 사고방식으로 인해 내 몸 그리고 내 주변의 사람들을 외면하기 시작했고 결국 나에게 찾아올 행운의 기회를 나는 놓쳐버린 순간들이 많았다.


책을 제자리에 올려두고 난 뒤에는 침팬지의 권력구도와 인간 사회의 구조를 비교하는 책을 펼쳐들었다.


마음이 한 번 정돈되니 다른 시선으로 세상을 읽는 일도 조금은 수월해지는 듯했다. 그렇게 오전 시간을 천천히 흘려보냈다.


화창한 오후 햇살을 보니 순간 걷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지만 마음은 곧 제자리로 돌아왔다.


미세한 신호를 무시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 만큼 이번주는 운동을 완전히 쉬기로 하고 다시 책상으로 돌아왔다.


막내는 요즘 사랑의 불시착과 태양의 후예에 이어 도깨비를 정주행 중이었다. 점심을 먹고 소파에 잠시 기대 앉았다가 그만 덩달아 드라마에 빠져들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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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숙작가의 도깨비 세계는 생각보다 강력했다.


막내 옆에 잠깐 앉아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1시간 20분이 지나 있었다.


문제는 시간이 아니었다. 과자를 주섬주섬 같이 먹고 있었고, 은탁과 김신 사이의 감정선에선 울컥함까지 올라왔다.


그리고 8편이 지나고 9편을 넘어가기 전 광고타임에서 막내에게 ‘건너뛰기 빨리 눌러!’라는 나의 재촉까지 하는 나를 발견하고는 순간 나 자신이 우스워서 웃음이 났다.


그렇게 빠져나오지 못할 것 같던 순간, 다행히도 아내의 전화가 울렸다.


회사 행사로 인해 일찍 퇴근해 볼링장에 들렀다가 들어오겠다는 연락이었다.


전화 한 통이 현실을 데려왔고, 나는 옆에 있던 막내에게 이유 없는 짜증을 내며 그제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막내는 어이없다는 표정에 짧은 미소로 화답했다. 그리고 이 정도의 나태함은 가족과 함께하는 일상의 작은 에피소드로 남아도 괜찮을 것 같았다.


저녁까지 해결하고 늦게야 집에 돌아온 아내 덕분에 오후에 시간을 더 많이 책상에 앞에 앉아 있을 수 있었다. 나는 낮에 도깨비에 홀렸던 시간을 만회하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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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오후에 내가 앉아 있던 자리에 아내가 앉아 도깨비에 홀린 듯 막내와 대화를 나누며 드라마를 보고 있는 모습에 웃음이 흘러나왔다.


오늘 하루를 천천히 되짚어보니 작은 흐트러짐도 결국은 나를 다시 제자리로 데리고 오는 과정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드라마에 빠져 흘려보낸 시간도, 감기에 눌려 운동을 멈춘 결정도, 아내의 전화 한 통에 현실로 돌아온 순간도 모두 지금의 내가 살아가는 방식의 일부였다.


병을 겪은 몸은 예전만큼 단단하지 않지만 그만큼 더 섬세한 감정과 더 정확한 신호로 나를 이끌어주고 있었다.


오늘의 나는 조금 느렸고 조금 흔들렸지만 그래도 다시 책상 앞에 앉아 나를 돌아볼 수 있었으니 충분했다.


일기를 정리하다 보니 오늘은 치료를 마치고 퇴원해서 집으로 돌아온지 90일이 되는 날이었다. 90일이라는 시간이 어느새 이렇게 쌓여 있다는 사실이 조금 놀랍게 느껴졌다.


처음 병원을 나서던 날의 불안과 두려움은 여전히 희미한 그림자처럼 남아 있지만, 그 사이 나는 몸과 마음의 작은 변화를 오롯이 견디며 조금씩 앞으로 밀려왔다.


먹는 것 하나, 움직이는 것 하나도 조심스러웠던 초반의 날들이 지나고, 이제는 몸이 보내는 신호를 읽을 만큼의 여유와 감각이 생겼다. 그 신호들을 놓치지 않으려 노력하며 시간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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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나에게는 회복의 증거가 되고,

그 증거들이 차곡차곡 쌓여 지금의 90일이 되었다.


완전히 예전의 몸으로 돌아간 것은 아니지만, 이 시간 동안 나는 다시 살아가는 법을 배우고 있었고, 여전히 나아지고 있다는 사실이 무엇보다도 큰 위로가 되었다.


이렇게 하루를 끝까지 통과한 것 자체가 회복의 또 다른 증거라는 사실을 조용히 받아들이며 나는 오늘의 마지막 페이지를 천천히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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