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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면’이라는 단어에 대해
그런 생각을 했다.

by 마부자


새벽의 공기는 이제 겨울처럼 차가워졌다. 창밖의 어둠은 아직 완전히 걷히지 않았고, 차가운 바람이 베란다 틈새로 들어왔다.


이런 새벽이면 마음의 깊은 곳에서 오래 멈춰 있던 문장들이 다시 떠오른다. 조용한 방 안에서 책을 펼치고 문장을 따라가다 보니 오늘 나를 멈춰 세운 문장은 이것이었다.

“중요한 것을 알면서도 알지 못하는 것, 위험한 것을 위험하다고 외치지 않는 것, <방 안의 코끼리>를 보고 침묵하는 사람이 잃게 되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의 이익과 평화입니다.


여러분의 방 안에 있는 코끼리는 무엇입니까? 만약 코끼리를 발견했다면 소리 질러야 합니다. 그러지 않다가는 코끼리발에 밟혀 다치기 십상입니다.”

어나더레벨 중에서 346page


이 문장을 읽는 순간 나는 자연스럽게 ‘외면’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태도. 보면서도 보지 않은 척하는 마음.


외면.

사물이나 사람의 겉으로 드러난 부분.

상대나 상황을 일부러 보지 않으려 하거나 모르는 척하는 행동.


우리는 살아가며 수많은 외면을 한다. 어떤 것은 필요해서 또 어떤 것은 두려워서 그리고 어떤 것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그러나 외면은 언제나 한 지점에서 시작된다.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 싫은 마음.’ 외면은 바로 그 순간의 회피에서 태어난다.


왜 우리는 외면을 선택할까? 보이는 것을 안 보려 하고, 들리는 것을 못 들은 척하며, 느끼는 것을 모른 척하는지를 잠시 눈을 감고 생각해 본다.


그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다 보면 외면은 단순한 회피가 아니라 어쩌면 생존을 위해 당연히 배워야 하는 현실이 되어버린 현대 사회를 떠올리게 된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누군가의 고통 앞에서 한 번쯤 멈칫해야 하는 순간에도, 너무 빠르게 판단하고 더 빠르게 뒤돌아서는 사람으로 변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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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한 세상에 적응하기 위해 택한 선택이었지만,

그 적응이 결국 자기 자신을

더 고립시키는 역설을 만든다.


낯선 사람의 표정 하나에도 거리를 두고, 도움의 손길조차 의심하고, 말 한마디 건네는 일도 조심하게 되면서 사회는 점점 서로를 외면하는 상황을 만들어 간다.


그리고 외면이 몸에 배기 시작하면, 타인을 향한 외면이 자연스러워지고 결국 우리는 자신에게 향하는 외면까지 쉽게 허락하게 된다.


이렇게 사회적 외면은 결국 내면의 둔감함으로 번지고 조금씩 사람의 감정을 흐리게 만들고 삶의 작은 경고음들을 듣지 못하게 만든다.


외면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방패처럼 시작되지만 결국 그 방패 안에 갇히는 사람도 나 자신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나중에서야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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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남을 외면하는 습관이 쌓이면

결국 나 자신도 외면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잠시 나의 투병생활을 돌아본다.


병이 본격적으로 나에게 닥쳐오기 전까지 내 몸은 분명 신호를 보냈다.


어떤 날은 피로가 쉽게 가시지 않았고, 어떤 날은 목의 통증이 미세하게 올라왔다. 하지만 나는 그 모든 신호를 일상의 피곤함으로 넘겼다.


‘괜찮겠지, 조금 쉬면 나아지겠지.’

이런 말을 되뇌며 나는 내 몸을 외면했다.


그 외면이 쌓여 어느 순간 나를 강제로 멈춰 세운 것이 투병이라는 현실이었다.


외면은 이렇게 우리의 삶에 흔적을 남긴다. 작은 무시가 큰 후회로 자라고, 작은 회피가 큰 고통으로 이어진다.


큰 고통을 찾아오는 순간 후회라는 감정이 밀려온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린 왜 작은 무시 즉, 외면을 할까? 그것은 바로 두려움 때문이다.


어떤 상황을 마주하면 나에게 책임이 생기고, 선택을 해야 하고, 감당해야 할 무게가 늘어난다. 그 두려움을 피하기 위해 우리는 외면을 택한다.


그러나 외면은 마음을 가볍게 만들어주지 않는다. 오히려 내 뒤편에서 천천히 더 큰 그림자를 키운다.


스스로를 돌보는 일을 뒤로 미루고, 감정의 무게를 제자리에 눌러두고, 몸이 보내는 신호를 묵살하는 일들이 습관이 되면 결국 잃는 것은 나 자신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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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면의 외면을 멈추는 일은 거창하지 않다.

일단 자신을 그냥 보려는 태도를 만드는 것부터

시작한다.


내 몸의 작은 변화, 마음의 불편함, 관계의 균열, 삶이 보내는 신호, 그 어떤 것도 의식적으로 바라보는 순간 외면은 힘을 잃는다.


문제를 당장 해결하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문제를 직면할 용기가 생긴다. 그 용기는 삶의 방향을 조금씩 다시 돌려놓는다.


나의 투병은 외면으로부터 시작되었지만, 투병이후를 생각해보면 내면의 목소리를 철저하게 듣고 바라보았다.


어제보다 조금 더 피곤한지, 통증이 어떤 패턴으로 오는지, 감정이 어떤 방식으로 흔들리는지의 그 모든 기록은 내가 나를 외면하지 않기 위한 작은 실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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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을 지키고 마음을 지키는 일은

결국 외면을 멈추는 데서 시작되었다.


마지막으로 나는 생각한다.

모두는 <방 안의 코끼리>를 가지고 있다.

어떤 이는 가족과의 문제.

어떤 이는 건강.

어떤 이는 마음의 상처.

어떤 이는 변화가 필요한 삶의 방향.


그러나 우리가 그 코끼리를 보는 순간부터

삶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한다.

보는 것이 두렵지만, 보지 않는 것이 더 위험하다.


나는 ‘외면’이라는 단어에 대해 그런 생각을 했다.

외면은 두려움을 안전이라는 이름으로 감추는 나의 선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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