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여름이었다.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며 무엇보다 먼저 생각해야 했던 것은 결국 ‘나’였다. 퇴사 후 삶을 다시 설계해야 했고 그 중심에는 내가 어떻게 진화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있었다.
변화가 아니라 진화라는 단어를 떠올렸던 이유는 단순히 다른 삶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이전의 나에서 더 나은 나로 확장되는 과정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 무렵 인터넷 서점을 둘러보다 우연히 마주한 책이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였다.
막내가 “아빠, 그 책 정말 유명한 책이에요”라고 말해줘서야 비로소 그 유명세를 알았지만 그보다 더 놀라웠던 것은 600페이지가 넘는 두께에도 불구하고 첫 장을 펼치자마자 책을 놓을 수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오늘 그 당시의 흥미를 다시 느끼며 넘긴 책장에서 나를 멈추게 한 문장이 있었다.
“우리 자신이 이기적 유전자가 무엇을 하려는 녀석인지 이해해 보자.
그러면 우리는 적어도 유전자의 의도를 뒤집을 기회를, 다른 종이 결코 생각해 보지도 못했던 기회를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기적 유전자 중에서 - page
의도.
1. 어떤 행동이나 말 그리고 결정 뒤에 미리 세워둔 마음의 방향
2. 앞으로 하려고 계획하는 생각
사전적 의미는 간단하지만 실생활에서의 의도는 그렇게 단순하게 움직이지 않는다. 나는 그 사실을 유난히 지난 1년 동안 깊이 느꼈다.
삶이 크게 흔들린 경험을 지나오면 단어 하나가 새롭게 보이기 마련이다. 퇴사와 투병이라는 두 갈래의 큰 파도가 연달아 밀려오던 시기였다.
그때 나는 내 의도가 무엇인지조차 말로 꺼내기 어렵던 순간이 많았다. 그저 버티는 것만으로도 하루가 지나갔고, 다음 날 아침이 오는 것이 감사할 정도였다.
하지만 지난 시간을 돌이켜보면 나는 의도를 말하지 않았을 뿐, 늘 의도 속에 있었다.
살고 싶다는 마음, 가족과의 시간을 더 이어가고 싶다는 바람, 다시 글을 쓰고 걸으며 살아가겠다는 조용한 약속들은 항상 내 안쪽에서 오래 자리 잡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 이 단어를 붙잡고 다시 생각해보면 한 가지 결론에 다다른다.
의도하지 않은 행동이라는 말은
사실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흔히 “그럴 의도는 아니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어떤 말을 내뱉는 순간, 어떤 행동을 선택하는 순간 그 안에는 이미 방향이 있다.
심지어 무심결에 던진 말조차 어딘가에서 비롯한 내 마음에서 나온 행동의 씨앗이었던 것이다.
이 의도를 나 자신에게 비춰보면,
원치 않는 결과가 나오면 의도하지 않은 것이라고 말하고, 원하는 대로 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의도한 것이라고 말하며 결과에 따라 의도를 분석하는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어쩌면 우리는 의도라는 단어를 정확히 아는 것이 아니라 편리하게 사용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살아가며 타인의 말투나 행동을 보면서 너무 쉽게 “그 사람의 의도를 알겠다”고 말한다.
때로는 상대가 한 말 뒤에 숨은 속마음을 해석하려 들고 가끔은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상황의 의도까지 추측한다.
하지만 정말 그럴 수 있을까? 내 의도조차 명확히 붙잡지 못하는 내가 타인의 의도를 정확히 알고 있다고 확신하는 일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 판단은 상대의 마음을 읽은 것이 아니라 내가 이미 품고 있던 생각과 감정과 경험을 상대에게 덧씌운 것일 뿐이다.
그렇다면 타인의 의도를 안다고 말하는 순간, 그 말은 상대에 대한 정의가 아니라 결국 나 자신의 마음에 대한 고백에 더 가깝지 않을까?
의도를 읽었다는 착각은
사실은 내 안의 이기심이 만든 결론일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우리는 타인의 의도를 해석하려 하기보다 내 의도를 먼저 들여다보는 일이 훨씬 더 중요하다.
의도를 아는 일은 내가 누구인지 아는 일이며 타인에 대해 함부로 확신하지 않으려는 겸손의 태도를 배우는 일이기도 하다.
나는 그동안 “의도하지 않았다”는 말을 자주 들었고 때로는 나도 그렇게 말해왔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 생각이 달라졌다.
그 말은 내가 선택한 방향에서 눈을 피하고 싶을 때 나오는 방어적 문장 같았다. 결국 의도는 존재했고 다만 내가 인정하기 어려웠던 것뿐이다.
의도를 붙잡아보면 감정의 흐름도 보인다.
흔들릴 때 의도는 흐릿해지고
차분할 때 의도는 선명해진다.
몸이 아플 때는 마음의 방향까지 흔들린다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그 반대였다. 투병의 어두운 시간을 지나오면서 나는 더 분명하게 나의 방향을 알아갔다.
삶의 두 번째 반을 어떻게 살아가고 싶은지, 누구와 시간을 쌓고 싶은지, 어떤 일의 의미를 남기고 싶은지, 내 의도는 그 모든 질문의 중심에 있었다.
그래서 이제 나는 하루의 시작에서 이 단어를 자주 떠올려보려 한다.
사람을 대할 때 어떤 마음으로 대하고 있는지
가족에게 어떤 방향을 보내고 있는지
글을 쓸 때 무엇을 남기고 싶은지
삶의 시간이 짧아질수록 의도는 더욱 중요한 것이 된다.
의도가 선명하면 걸음은 덜 흔들리고 걸음이 덜 흔들리면 하루는 조금 더 단단해진다.
불안한 날에는 의도를 붙들어 마음을 가라앉히고, 피곤한 날에는 의도를 바라보며 하루를 정리하고, 감정이 복잡해진 날에도 의도는 마지막에 남아 나를 앞으로 가게 한다.
나는 ‘의도’라는 단어에 대해 그런 생각을 했다.
의도란 결말에 흔들리지 않는, 행동의 불길을 타오르게 한 최초의 불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