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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4.책으로 시작해 책으로
마무리되는 하루였다.

편도암으로 인한 항암과 방사선 치료 후 퇴원 93일차의 기록

by 마부자


아침부터 책상에 앉아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를 펼쳤다. 원래라면 독서 후 생각을 정리하는 글은 따로 남기지만 오늘만큼은 그럴 수가 없었다.


책의 세계가 하루 종일 나를 사로잡았고, 다른 생각이 끼어들 여지가 없을 만큼 깊은 충격과 긴 여운이 마음을 뒤흔들었다.


책장을 넘기는 동안 여러 번 숨을 고르게 했다. 슈호프의 하루가 너무 적나라해서 그럼에도 이상하리만큼 담담해서 오히려 더 크게 마음에 밀려왔다.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조차 믿기 힘든 고통의 공간에서, 그의 첫 선택이 겨우 어제 먹다 남은 빵조각을 숨기는 일이라는 사실.


영하의 공기를 온몸으로 버티며 일을 하러 나가기 위해 준비하는 과정이 고작 ‘하루를 넘기기 위한’ 생존의 의식이라는 사실.


그 모든 장면을 따라가며 나는 몇 번이고 멈춰 섰다. 인간이 견뎌야 했던 현실이 이렇게까지 잔혹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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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일상이

얼마나 큰 감사의 조건인지 새삼 깨닫게 되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나를 붙잡아둔 것은 그 절망적인 환경 속에서도 자신만의 방식으로 하루를 버텨내는 슈호프의 태도였다.


그는 불평을 품지만 무너지지 않는다. 좌절을 느끼지만 정작 그 좌절에 자신을 넘기지 않는다.


주어진 상황을 어떻게든 최선의 형태로 바꾸기 위해 몸을 움직이고 손을 쓰고 마음을 다잡는다.


작은 일에서도 최선의 효과를 얻으려는 그의 태도, 그리고 지켜야 할 본성을 잃지 않으려는 그의 마음가짐은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를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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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서 시선을 떼고 방 안을 둘러보니 너무 따뜻했다.


몸이 편안하다는 사실이 오히려 죄책감처럼 밀려오기도 했다.


그것이 비교할 대상이 아님을 알면서도 병실에서의 지난 시간들, 추위 속에 몸을 웅크렸던 새벽들, 치료의 통증과 끝없는 기다림이 어딘가 겹쳐지며 묘한 떨림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오늘 내가 가장 오래 붙잡았던 감정은 감사였다. 누군가에게는 하루를 버티는 일이 생존의 전부였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 나는 지금의 내 삶을 다시 바라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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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것이 기적 같은 일상이라는

사실을 잊고 살아왔던 것 같다.


내가 치료를 마치고 퇴원해 이런 책을 읽으며 사유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차가운 병실에서도 누군가가 토닥여 주었고 집의 온기가 나를 감싸고 있었다.


병의 흔적은 여전히 몸에 남아 있고, 완전한 회복을 위해 걸어가야 할 길도 아직 길지만 오늘만큼은 한 가지를 또렷하게 알게 되었다.


극한의 환경에서도 인간은 다시 일어서는 힘을 만들어낸다는 것. 그리고 그 힘은 거창한 것이 아니라 오늘을 포기하지 않는 마음에서 출발한다는 것.


슈호프가 그랬듯 나 역시 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만큼의 최선을 다해 하루를 버텨내고 쌓아가는 것.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을.


오늘 하루는 책 속의 세계가 내 삶의 풍경과 겹쳐지며 조용하지만 강한 울림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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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늘, 인간이 가진 버티는 힘의 깊이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책에서 시선을 떼고 난 뒤에도 마음 한쪽은 여전히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속에 머물러 있었다.


더 길게, 더 깊게 이야기를 적어두고 싶었지만 그 감정의 결은 서평에서 천천히 풀어내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잠시 손을 놓았다.


책이 주는 여운이 너무 커서, 다른 문장을 섣불리 얹는 것이 오히려 글의 숨을 흔들어놓을 것 같았다.


대신 오늘은 오랜만에 몸을 다시 움직이는 시간을 가졌다. 지난 일주일간 감기로 미뤄두었던 운동을 다시 시작했다.


이제 기침도 가라앉고 코막힘도 사라져 일상의 리듬이 돌아왔다. 아프면 병원에 가야 한다는 너무 단순한 사실을 다시 확인하게 된 시간이었다.


그동안 조금 괜찮아지겠지라며 넘겼던 사소한 불편들이 완치 전의 몸에는 결코 사소하지 않다는 것을 이번 감기가 또 한 번 강조해주었다.


아직은 찬바람이 몸속 깊이 파고드는 계절이라 무리하지 않기로 했다. 밖으로 나가는 대신 실내에서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땀을 흘렸다.


9월 1일부터 두 달 넘게 꾸준히 해왔던 운동도 단 일주일 쉬었다고 허벅지와 종아리가 무겁게 느껴졌다.


역시 운동은 3일만 쉬어도 몸이 안다는 오래된 말을 오늘 다시 온몸으로 확인했다.


땀을 흘리는 동안 내 몸은 천천히 다시 원래의 박자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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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슬 듯 버겁게 삐걱거리며 돌아가던 기계가

윤활유의 효과로 부드러운 톱니바퀴가 돌듯

나를 조금씩 회복시키는 것 느껴졌다.


자전거 페달을 밟는 동안 막내가 방에서 나와 식사를 챙겨 먹고 소파에 앉아 일본 애니메이션을 보기 시작했다.


페달을 밟으며 함께 화면을 바라보게 되었다. 그런데 어지간한 영화나 드라마는 한번 보기 시작하면 빠져들 텐데, 이 애니메이션은 아무리 집중해보려 해도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장면과 대사가 빠르게 흘러가고 일단, 말이 되지 않는 판타지의 내용에 난 그저 쓴웃음만 나올 뿐이었다.


넋을 놓고 보는 막내의 표정을 보며, 나와 막내 사이의 세대차이가 꽤 멀리, 생각보다 더 크게 벌어져 있음을 실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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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이 간극을 확인하는 일조차 나에겐

의미 있는 새로운 경험일지도 모른다.


운동을 마치고 간단히 점심을 챙겨 먹은 뒤에는 지난 주말 읽었던 <침팬지 폴리틱스>의 서평을 본격적으로 정리했다.


책을 읽으며 순간의 감정을 스케치북에 옮겨 적어두었던 메모들을 다시 펼쳐보니 그때의 생각과 감정이 고스란히 되살아났다.


포스팅용 글을 만드는 과정은 단순한 정리가 아니라나 자신을 다시 들여다보는 시간처럼 느껴졌다.


어떤 문장을 밑줄 쳤는지, 무엇을 의문으로 남겨두었는지, 무엇에 가장 오래 머물렀는지.


그런 것들이 모두 지금 나의 관심사와 시선을 보여주는 흔적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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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하루가 흘러갔다. 오늘 하루를 정리하면

책으로 시작해 책으로 마무리되는 하루였다.


수용소의 하루를 건너온 슈호프의 마음을 떠올리며, 나는 오늘을 다시 조금 더 정돈된 마음으로 살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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