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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향’이라는 단어에 대해 그런 생각을 했다.

by 마부자


새벽 공기가 어둠을 밀어내며 서서히 밝아오고 방 안의 공기는 때 이른 초겨울의 차가움을 머금고 있었다. 그러나 오히려 그 차가움이 나를 더 선명하게 만들었다.


창문 틈으로 들어온 강한 바람과 냉기가 몸을 스쳤고, 오늘도 따뜻한 차한잔을 우려 책상 앞에 앉았다. 오늘의 단어를 만나기 위한 작은 의식 같은 시간이었다.


오늘 새벽 내 시선을 붙잡은 문장은 이랬다.

“인간은 보통 자기 자신에 대한 오해와 착각을 안고 살아갑니다....


보통은 내가 생각하는 나의 모습을 실제의 나라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이 생각이 실제와는 딴판인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스스로에 대해 느슨한 평가 기준을 적용하여 과대평가합니다.


하지만 타인에게는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고 싶어하는 본능적인 편형이 있습니다.


이 편향은 결국 나를 평균이상의 지성을 가진 합리적이고 공정하며 편견이 없는 사람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합니다.” 어나더 레벨 중에서 - 257page



편향

1. 어떤 생각, 판단, 행동이 균형을 잃고 특정 방향이나 입장에 기울어진 상태

2. 대상을 바라볼 때 객관성을 잃고 주관적, 감정적으로 해석하는 경향


편향의 사전적의미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한쪽으로 치우침을 말한다. 균형을 잃고 기울어진 시선을 의미는 것이다.


인간은 아니 나 스스로만 보아도 자신에게 너그럽다. 어떤 실수도 그럴 수 있는 일로 해석하고, 어떤 부족함도 상황이 그랬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우리는 자신에게는 늘 여러 개의 변명을 허락하면서도 타인에게는 그만큼의 자유를 잘 주지 않는다.


작은 실수에도 날카롭게 반응하고, 상대의 행동을 단숨에 성격으로 단정하며, 한 번의 판단으로 사람 전체를 규정하고 싶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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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순적인 태도에는 이유가 있다.

스스로를 조금이라도

더 좋은 사람으로 느끼고 싶어 하는

본능 때문이다.


마음 깊은 곳에는 나는 그래도 평균보다는 낫다라는 은근한 기대가 깔려 있고, 이 기대를 지키기 위해 우리는 자신을 부드럽게 평가하는 대신 타인을 조금 더 엄격하게 판단한다.


그렇게 해야만 상대적으로 나의 기준이 높아 보이고, 내가 합리적이고 공정하며 판단력이 좋은 사람이라는 착각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과정은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진다. 우리는 의도하지 않았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매 순간 이 편향이 판단의 방향을 바꾼다.


누군가의 행동을 해석할 때, 나의 감정이 개입될 때, 불편한 상황에 마주할 때마다 이 기울어진 잣대가 조용히 작동한다.


그래서 우리는 예상보다 훨씬 자주 자신을 과대평가하고, 예상보다 훨씬 쉽게 타인을 과소평가한다.


그리고 이 단어가 내 삶에서 떠오르게 하는 감정은 사전적 정의보다 훨씬 크고 복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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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바라보는 나의 모습.

내가 타인을 바라보는 방식.

내가 어떠한 상황을 해석하고 판단하는 지점.


그 모든 곳에 이미 편향이 스며들어 있었음을 인정하는 순간 마음이 묘하게 흔들렸다.


나는 투병을 겪는 동안 내 안의 편향을 더 자주 마주했다. 치료가 잘 되고 있다고 믿고 싶을 때는 작은 회복의 신호만 크게 확대해 보았다.


반대로 몸이 조금이라도 불편하면 모든 상황을 최악으로 해석하는 습관이 자연스럽게 튀어나왔다.


희망도 불안도 모두 편향을 통해 증폭되었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나는 늘 그 기울어진 마음 위에서 감정의 균형을 잡으려 버둥거렸다.


편향을 떠올릴 때마다 가장 아픈 순간은 나 자신에 대한 착각이었다. 나는 내가 꽤 합리적이고, 차분하고, 객관적이라고 믿어왔다.


그러나 항암 치료를 받고 몸이 무너지는 과정 속에서 그런 자신감은 쉽게 사라졌다. 불안한 날에는 모든 상황을 비관적으로 해석하며 나조차 믿지 못할 말을 내뱉을 때도 있었다.


반대로 조금 나아지면 마치 모든 것이 다시 정상으로 돌아온 듯한 착각에 빠져 무리하게 행동했다.


그 모든 행동의 시작에는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편향이 있었다.


감정의 변화에 따라 판단이 요동친다는 사실은 때로 나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하지만 병을 겪으며 배운 것이 있다면, 편향을 완전히 없앨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인간은 감정의 존재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기울어진 시선으로 세상을 볼 수밖에 없다.


중요한 것은 그 기울어진 사실을 인정하는 일이다. 나의 판단이 늘 옳지 않을 수 있으며, 지금의 감정이 사실을 왜곡하고 있을 가능성을 받아들이는 일.


그 인정의 순간이야말로 편향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유일한 길이었다.


편향을 자각하는 일은 결국 나를 이해하는 일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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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왜? 어떤 상황에서는 지나치게 예민해지고,

왜? 어떤 상황에서는 무심할 만큼 둔해졌으며,

왜? 어떤 날은 사람들에게 과하게 기대했고,

관계가 부담스러웠는지.


그것을 이해하고 편향을 인정하기로 했다. 편향을 인정했다고 해서 내가 부족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기울어진 줄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비로소 중심을 잡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어쩌면 투병이 나에게 남긴 가장 큰 위로는 바로 이 점이었다. 삶은 균형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균형을 잃어가면서도 다시 찾아가는 연습을 요구한다는 것.


그 연습을 가능하게 하는 힘은 완벽한 객관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기울어진 나를 인정하는 용기에서 나온다는 것.


나는 ‘편향’이라는 단어에 대해 그런 생각을 했다.

편향은 마음속에서 보이지 않게 기울어져 있는 조정되지 않은 저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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