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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부자 Jan 08. 2025

<일상>1월 7일 화요일의 깨달음

불균형도 충분히 평등이 될 수 있다는 진실을 알게 되었다.

금주 7일차, 명상, 목표 읽고 쓰기, 공감 및 댓글의 루틴을 차질 없이 진행하며 몸과 마음 그리고 머릿속을 가볍게 기분 좋은 아침을 시작했다. 아내의 출근을 배웅하고 책상에 앉아 새로운 책을 펼치기 전에 책상위에 놓여 있는 “태도에 관하여”에 밑줄 그은 부분과 플래그 붙인 부분을 읽어보았다. 


최근 독서를 하며 작가들만의 독창적인 필체가 있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느꼈다. 이전에는 글이란 다 거기서 거기일 것이라고, 모두가 똑같은 방식으로 쓰고 표현한다고 여겼다. 그러나 그런 생각으로 살아온 지난 50년의 세월이 새삼 부끄럽게 느껴진다. 마치 내가 스스로 문학의 정원 밖에 머물며 문을 두드릴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것처럼.


그래도 나름대로 핑계를 대자면, 내 삶은 주로 회사와 성장이라는 목표에 맞추어져 있었다. 그 과정에서 손에 든 책들은 언제나 자기계발서였고, 그 안에 담긴 언어와 어조는 다들 비슷비슷했다. 무언가를 '더 잘하기 위해', 혹은 '더 나아지기 위해'라는 강박 속에서 소비한 글들은 작가의 색채보다는 실용적인 메시지에만 초점을 맞추었다. 그 결과 나는 작가의 목소리, 그 개성이 글에서 풍기는 아우라를 알아차릴 기회를 스스로 차단한 셈이었다.


책을 통해 새로운 생각과 감정을 느끼게 되는 요즘, 나는 문득 떠오르는 질문에 스스로 답해야 한다. 이제라도 그 문학의 문턱을 넘어서 보겠느냐고. 과연 나는 어떤 글의 색깔을 좋아할까? 아니면, 나만의 색깔은 있을까? 답은 아직 모르겠지만, 부끄러움과 함께 찾아온 이 작은 깨달음이 앞으로의 내 독서를 조금 더 풍요롭게 만들어줄 것만 같다.


그런 내가 한강, 양귀자, 최진영, 임경선, 김금희, 황석영 같은 작가들과 만난 후부터는 세상이 조금씩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이들은 모두 각자의 언어로 세상을 직조하며, 비슷한 주제를 다루고 있어도 글이 풍기는 색과 결은 완전히 달랐다. 그들의 감성은 한결같이 날카롭고 깊으면서도, 그 표현 방식은 서로 다른 빛깔로 빛났다.


 한 권의 책을 펼칠 때마다 나는 그 차이를 더욱 선명하게 느끼며, 같은 이야기라도 어떻게 써내려가는지에 따라 독자의 마음에 닿는 울림이 이렇게 다를 수 있음을 깨달았다.


책이라는 것이 단순히 지식이나 정보의 전달자가 아니라, 한 작가가 가진 세계관과 감정의 진동을 독자에게 전하는 도구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 깨달음은 내가 지금껏 놓쳐왔던 책의 매력을 다시금 깨닫게 해주었다. 책을 읽는 행위는 단순히 활자를 눈으로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작가가 만들어낸 하나의 우주를 탐험하는 것임을, 나는 이제서야 알게 된 것이다.


한강의 섬세한 고요함, 양귀자의 치열한 삶의 묘사, 최진영의 담백하면서도 깊이 있는 울림, 임경선의 따뜻하지만 날카로운 통찰, 김금희의 여운 깊은 문장들, 그리고 황석영의 묵직한 역사와 인간에 대한 이야기까지. 이들 각각의 글은 마치 서로 다른 악기의 연주처럼 나를 새로운 세계로 이끌었다. 나는 이제 책을 읽을 때마다 작가가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보다, 어떻게 말하는지를 더 유심히 들여다보게 된다.


책의 매력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 내가 알던 세상을 작가의 눈으로 다시 바라보게 해주는 힘, 그리고 그 시선을 따라가는 동안 나조차 몰랐던 내 마음의 틈을 비추는 힘. 책은 여전히 같은 종이와 잉크로 이루어진 물건일 뿐이지만, 그 안에 담긴 작가의 손길과 목소리가 그것을 살아 숨 쉬게 만든다. 이 깨달음은 내 독서의 즐거움에 새롭고도 강렬한 깊이를 더해주었다.


그런 면에서 임경선 작가는 최근 내가 읽었던 다른 작가들과는 또 다른 결의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녀의 글은 감각적이고도 담백했다. 화려한 미사여구나 과장된 표현 없이도, 오히려 그 평범함이 그녀의 글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 그 매력을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평범한 필체 속에 담긴 강력한 메시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녀의 글을 읽는 동안, 나는 눈시울이 붉어지거나 가슴이 요동치는 드라마틱한 감정을 느끼지는 않았다. 대신 글이 건네는 메시지는 조용히, 그러나 묵직하게 마음에 가라앉았다. 


특히 감성의 과잉이나 과장을 배제한 그녀의 필체는 오히려 일상에 대한 새로운 시선을 선사했다. 소소한 것들에서 삶의 본질을 찾아내는 방식, 그리고 그걸 담담하게 풀어내는 힘. 어쩌면 그것이 그녀의 글이 가진 가장 큰 매력일지도 모른다. 내가 글을 읽으며 느낀 ‘내 일기 같은’ 친숙함은 바로 그 담백함과 정직함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다른 책들은 마치 누군가의 일기를 몰래 훔쳐보는 기분이었다. 그들의 글은 그들만의 이야기였고, 나는 그들의 세계를 엿보며 감탄하거나 공감했다. 하지만 임경선 작가의 글은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그녀의 필체는 마치 내가 쓴 글을 그녀가 대신 읽어주는 것 같았다. 그래서 더 공감이 되었고, 그 공감은 어느새 깊은 감동으로 이어졌다.


물론, 이 모든 생각은 내가 이제 막 그녀의 책 한 권, “태도에 관하여”를 읽고 떠올린 아주 개인적이고 전형적인 소감일 뿐이다. 하지만 그런 단순한 감상이 주는 울림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그녀의 글을 읽으며 느낀 것은, 단순히 작가가 무언가를 내게 전하고 있다는 느낌이 아니라, 내가 쓴 일기를 그녀가 조용히 읽어주며 그 속의 감정들을 되새겨주는 것 같다는 점이었다.


그 글의 울림은 단지 공감에서 끝나지 않았다. 글이 내 마음 깊은 곳을 건드릴 때마다 그 감동은 자연스럽게 작가에 대한 애정으로 이어졌다. 마치 그녀가 내 마음을 꿰뚫어 보고 있는 듯한, 마치 나를 위해 특별히 이 책을 써 내려간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책을 덮으면서 스스로에게 물었다. “이 작가는 어떻게 나를 이렇게 잘 알지? 어떻게 내 마음을 이렇게 선명하게 들여다볼 수 있지?”


책을 읽는 내내 그런 감정이 나를 감쌌다. 나만의 이야기를 나만의 방식으로 풀어낸 것 같은 그녀의 글에서 나는 깊은 위로를 받았다. 그리고 그 위로는 어떤 특별한 연대감을 만들어냈다. 작가와 독자의 경계를 넘어서, 그 순간만큼은 그녀와 내가 같은 세계 속에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책을 통해 만나는 작가들의 삶과 철학은 단순히 글을 읽는 것을 넘어 하나의 경험이 된다고 하는 말이 이런 감정 때문인 것 같다. 그 경험은 내가 평소에 알지 못했던 세상을 열어주기도 하고, 때로는 내 안의 깊은 감정들을 끌어내기도 한다. 

특히 “태도에 관하여”에서 내가 임경선 작가의 매력에 깊이 빠진 부분은 그녀가 “평등”에 대해 이야기할 때였다. 그녀의 글은 내가 가지고 있던 평등에 대한 고정관념을 완전히 뒤흔들었고, 그 개념을 새로운 시각으로 확장시켜 주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평등은 5:5의 완벽한 균형을 떠올리기 쉽다. 공정한 나눔, 정확한 균형, 계산된 대칭. 그러나 임경선 작가는 이런 숫자로 정의되는 평등의 한계를 가볍게 뛰어넘었다. 그녀는 현실에서는 9:1이나 8:2 같은 불균형조차 충분히 평등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 개념은 충격적이었다. 단순한 숫자 이상의 평등, 상대와의 진솔한 대화와 합의를 통해 만들어지는 평등이라니. 나는 그 순간, 내가 붙들고 있던 평등의 이미지를 놓아야만 했다.


그녀는 우리가 서로의 차이를 이해하고 조화를 이루어가는 과정에서, 관대함이야말로 평등을 완성하는 열쇠라고 말한다. 이 관대함은 단순히 상대를 받아들이는 것을 넘어, 서로의 입장을 헤아리고 어긋난 무게감을 함께 조율하는 능력이다. 불완전한 현실 속에서 상대방과 내가 맺는 관계가 어떤 모양새로 정리되더라도, 그 안에 진정성과 존중이 있다면 그것이 곧 평등이라는 것이다.


그녀의 이러한 관점은 정말 놀라웠다. 나를 단순한 숫자나 규범에 갇힌 평등의 틀에서 벗어나게 했고, 더 넓고 깊은 시각으로 이 개념을 다시 바라보게 만들었다. 나는 그녀의 글을 읽으며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관계란 언제나 완벽하지 않다. 그러나 그 불완전 속에서도 우리는 충분히 공존하고 조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그녀의 메시지는, 단순한 깨달음을 넘어 내 삶의 태도에 변화를 요구했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평등은 단순히 무엇을 얼마나 나누는지가 아니라,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함께 살아가려는 노력 속에서 비로소 완성된다는 것을. 그리고 그녀의 글이 보여준 그 관대함의 힘은 내 삶에서도 꼭 닮고 싶어지는 지점이었다. 그녀의 글이 내 안에 남긴 여운은, 단순한 동의나 감탄을 넘어 내가 앞으로의 관계를 대하는 방식에 대해 고민하게 만들었다.


나는 그동안 평등이라는 개념을 정말 잘못된 방식으로 이해하며 살아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알고 있던 평등은 단순했다. “너와 내가 똑같이.” 물질적인 기준을 중심에 둔 이 사고방식은 어찌 보면 철저히 이기적인 관점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저울이 수평이 되었을 때만이 평등이라고 여겼지만, 이제는 묻지 않을 수 없다. 과연 그것이 진정한 평등일까? 그저 균형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우리가 흔히 평등이라고 믿어온 것, 즉 내가 가진 만큼 상대도 똑같이 가지고 있을 때만을 평등이라고 정의한다면, 이 사회에 불평등이 존재할 리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본성에는 더 많이 갖고 싶어 하고, 더 나아가고 싶어 하는 욕망이 내재되어 있다. 그렇다면, 9:1이라는 비율이 어떻게 평등이 될 수 있을까? 이 의문 속에서 임경선 작가는 명쾌한 답을 내게 알려주었다.


그녀는 평등이란 단순히 균형 잡힌 상태가 아니라, “차이를 이해하고 조화를 이루어가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나는 이 한 문장에서 깊은 울림을 느꼈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히 숫자나 물질적 나눔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 가진 감정의 다양성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공감, 이타심, 지혜, 사랑, 배려—이 모든 감정의 결합이야말로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고유한 행동이며,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사회를 만들어 살아갈 수 있는 이유가 아닐까.


결국, 이 사회를 더욱 성숙하고 조화롭게 만드는 핵심은 바로 감정을 긍정적으로 결합할 수 있는 능력에 있다. 그리고 그런 능력을 지닌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우리는 더 평등한 사회를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그러한 능력을 배울 수 있는 가장 좋은 도구가 바로 이라고 믿게 되었다.


책은 단순히 정보를 전달하는 것을 넘어, 작가의 통찰을 통해 독자의 감정을 자극하고, 더 깊은 공감을 가능하게 한다. 그렇기에 작가들은 단순히 이야기를 쓰는 사람들이 아니라, 지금 같은 불평등한 사회를 균형 잡힌 평등의 사회로 이끄는 데 필요한 핵심적인 요소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임경선 작가의 글이 내게 가르쳐준 것은 단순히 평등의 재정의에 그치지 않았다. 그녀의 글은 내가 그동안 놓치고 있던 인간적인 가능성, 그리고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작가들의 역할을 다시금 생각하게 만들었다. 이제 나는 저울의 수평만이 아니라, 그 수평을 이루기까지의 과정을 더 깊이 바라보고 싶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평등에 다가가는 길이 아닐까.


책꽂이에 책을 가지런히 넣으며 나는 조용히 다짐했다. 머지않은 시기에 반드시 다시 꺼내 보겠지. 손에 익은 책의 무게가 주는 안도감과 함께, 그 책은 에세이 분야의 자리를 차지했다. 그리고 곧바로 새로운 책을 꺼냈다. 에세이 두 권을 연달아 읽었으니, 오늘은 다시 자기계발서로 돌아갈 차례였다.


이번에 손에 든 책은 성공학의 대가 얼 나이팅게일의 “성공은 이미 내 안에 있다”. 제목부터 심장을 두드리는 이 책은 단지 표지의 문구만으로도 나를 설레게 만들었다. 성공이 이미 내 안에 있다니? 그 메시지는 아직 열어보지도 않은 책 속으로 나를 강하게 이끌었다.


과연 어떤 내용이 들어 있을까? 궁금함을 가득 안고 나는 조심스럽게 첫 페이지를 펼쳤다. 책을 여는 순간의 설렘은 언제나 새롭고, 이번에는 더 특별한 기대감을 품게 했다. 역시 책은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나를 성공의 마인드로 이끌었다. 저자가 말하는 성공의 마인드셋은 내가 앞으로 살아가면서 반드시 몸에 지녀야 할 습관으로 만들어야 하는 것들이었다. 책에 대한 깊은 이야기는 독서 서평으로 남기고 책을 덮었다. 


오늘은 화요일, 매주 열리는 볼링 정기전이 있는 날이다. 작년까지만 해도 나는 총무로서 모든 것을 책임지며 정기전을 준비했다. 그러나 올해는 조금 다른 모습을 그리고 싶었다. 직책의 무게를 내려놓고, 오랜만에 일반회원으로 참석하며 편안하게 즐기겠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 회원들이 개인적인 사정으로 탈퇴하거나 정기전에 참석하지 못하는 일이 잦아졌고, 결국 나는 한 해 더 임시 총무직을 맡게 되었다. 이 결정은 쉽지 않았다. 올해는 내 목표를 위해 온전히 한곳에 정진하리라 다짐했던 터라, 갑작스럽게 그만두고 싶은 마음도 없진 않았다. 하지만 함께해 온 사람들과의 신뢰를 저버릴 수 없다는 생각이 더 크게 다가왔다.


내 목표도 중요하지만, 오랜 시간 함께한 이들과의 약속을 지키는 것이 더 우선이라는 판단이었다. 결국 마땅한 후임자가 나올 때까지 최소한의 활동만 하기로 하고, 회원들에게 양해를 구했다. 짐을 내려놓기란 쉽지 않지만, 그럼에도 한 발 한 발 앞으로 나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올해는 이렇게 조금 더 균형을 찾는 시간이 되기를 스스로 다짐해본다.


올해 초만 해도 25명이었던 클럽의 인원이 이제는 14명으로 줄어들었다. 한때 화요일 정기전을 열면 최소 18명 이상이 모여 활기가 넘쳤는데, 오늘은 겨우 7명이 전부였다. 예상은 했지만, 막상 텅 빈 레인과 예전만 못한 열기를 마주하니 마음 한구석이 허전해졌다.


물론, 동호회의 특성상 참석을 강제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 각자 저마다의 사정이 있는 만큼 그 이유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이해하는 마음과 허전함은 별개의 문제였다. 여전히 그 빈자리를 채울 수 없는 아쉬움이, 손끝에 스치는 볼링공처럼 묵직하게 다가왔다.


예전의 북적거림이 떠올라 문득 그때가 그리워졌다. 웃음소리와 경쟁심이 뒤섞였던 시간들, 그 안에서 내가 느꼈던 동료애와 열정이 이렇게 멀게 느껴질 줄은 몰랐다. 하지만 그런 기억들이 남아 있기에, 지금의 적막함이 더 크게 다가오는지도 모른다. 오늘의 이 조용한 정기전이 어딘가 조금 쓸쓸하게 느껴지는 저녁이었다.


볼링을 마치고 회원들과 함께 간단히 저녁식사를 하며 자연스럽게 클럽의 회원 감소에 대한 이야기가 오갔다. 모두가 느끼고 있던 문제였기에 대화는 금세 깊어졌고, 오랜 시간 활동해 온 선배 회원들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그분들은 조용히, 그러나 단단한 목소리로 말했다. 동호회를 운영하다 보면 이런 위기는 언제든 찾아오곤 한다고.


그분들에 따르면, 코로나 시기에도 지금과 비슷한 상황이 있었지만, 사실 그 이전에도 정기전에 고작 4명만 참석했던 때도 있었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국밥을 먹던 수저를 거의 놓칠 뻔했다. 4명이라니. 그 정도면 정기전이라고 부르기조차 민망했을 것이다.


그때 한 분이 덧붙이며 이렇게 말했다.
 “어느 때나 위기는 오더라. 두 명이면 어떻고 세 명이면 어떠냐. 내가 좋으면 둘이서 즐겁게 치면 되는 거지. 그렇게 그냥 나와서 치다 보면, 인원은 다시 늘어나게 되더라.”


그 한마디가 내 마음에 깊이 박혔다. 불만도, 불안도 없이, 마치 오래된 나무처럼 단단하고 묵묵하게 그 자리를 지켜온 사람들이 할 수 있는 말이었다. 그 말에는 경험에서 나온 믿음과 여유가 배어 있었다. 나는 국밥 위로 김이 피어오르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며 그 말을 곱씹었다.


두 명이어도 괜찮다. 내가 좋으면 되는 것이다. 그 단순하면서도 강력한 진리 앞에서 내 마음 한구석의 조바심이 조금씩 녹아내렸다. 그리고 그 말 속에 담긴 묘한 위로가 오늘 저녁 내게 오래도록 남았다.


사실, 그분의 말은 누군가에게는 별다른 의미 없는 말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게는 너무나도 가슴에 와닿는 말이었다. 단순한 위로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조금만 더 깊이 새겨보면 그 안에 담긴 진정성과 통찰이 얼마나 멋진지 알 수 있었다.


그분의 말은 내 머릿속에서 이렇게 재구성되어 각인되었다.
 "위기는 온다. 그러나 포기하지 말고 즐기면서 꾸준히 하면 반드시 성공한다."


그렇다. 이 동호회가 20년 넘게 이 볼링장에서 명맥을 이어올 수 있었던 데는 분명 해체의 위기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해체되지 않고 유지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그들의 끈기와 열정 덕분이었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불협화음이 없을 수는 없다. 때로는 갈등이 생기고, 회원들이 떠나기도 하고, 정기전의 참석 인원이 몇 명 남지 않을 때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누군가는 끝까지 동호회를 지키며 함께하려는 마음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 열정과 애정이 끈이 되어 동호회를 이어온 것이다.


오늘 나는 그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동호회를 움직이는 진짜 이유는 거창한 계획도, 화려한 명성도 아니었다. 바로 사람들이 함께하고자 하는 마음, 그리고 즐기며 꾸준히 이어가는 열정이었다. 그 열정이 있었기에 이 동호회가 긴 시간 동안 흔들리지 않고 지금까지 이어져 온 것이다.


내가 오늘 들은 그 말은 단순한 조언을 넘어 삶의 또 다른 태도를 가르쳐 주는 듯했다. 위기가 찾아와도 포기하지 않는 것, 즐기면서 꾸준히 해나가는 것. 그 말은 동호회뿐만 아니라 내 삶에도 깊이 새겨질 만한 메시지였다.


의미 있는 저녁 시간이었다. 사명감이라고까지는 말할 수 없지만, 함께해야 한다는 의무감 같은 것이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았다. 동호회와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며 짧은 시간이었지만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오랜 명맥을 이어 온 동호회의 저력을 새삼 실감하며, 그 속에서 나도 작은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 묘하게 뿌듯했다.


그런 점도 그렇지만, 오늘이 더욱 의미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바로 금주를 했다는 것이다. 한 잔의 유혹이 슬며시 다가왔지만, 나는 그 유혹을 잘 이겨냈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스스로 약속을 지켰다는 작은 성취감이 오늘을 더욱 특별하게 만들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운전을 하며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잠자리에 들어 아내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비록 어깨 통증으로 인해 잠시 볼링을 쉬고 있지만, 통증이 괜찮아지면 다시 동호회 활동을 계속하자고 제안했다. 아내는 흔쾌히 좋다고 했다. 그녀는 사실 내가 퇴사를 하고 어깨까지 아프면서 볼링까지 그만둘까 내심 걱정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게다가 볼링장의 위치가 집과 다소 멀다 보니, 이동이 불편해서 내 눈치를 보고 있었던 것도 같았다. 

나는 아내의 걱정을 가볍게 달래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 인원이 많든 적든, 우리 둘이 즐겁게 활동하면 되는 거지.”


그 말을 들으며 아내가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나 역시 웃었다. 그제야 오늘 하루가 완전히 정리되는 기분이었다. 많은 것을 배웠고, 조금 더 나아갈 힘을 얻은 하루였다. 


그렇게 의미 있는 하루를 미소로 마무리하며 나는 고요히 잠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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