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9.회복은 시간과 인내 조용한
기다림이 필요하다

by 마부자

어두운 새벽, 창틈 사이로 스며든 미세한 바람이 방 안의 공기를 서늘하게 만들 정도로 차가운 공기였다.


베란다 창가로 걸어가 유리창을 열어보니, 하얗게 얇은 성에가 끼어있었다. 새벽의 기온이 어떤 말도 없이 겨울의 초입을 알려주는 것처럼 느껴졌다.


문득, 밤새 얼어붙은 공기와 베란다 화초들의 온기가 맞닿아 생긴 성에의 흔적을 보며 우두커니 서서 짧은 명상속에서 지난 치료 기간의 시간을 떠올렸다.

창문에 맺힌 하얀 겨울의 흔적은

마치 내 안에서 굳어 있던

두려움과 불안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았다.


처음 암 진단을 받았을 때의 막막함, 병원 복도를 오가며 느꼈던 죽음의 그림자, 입원 병실 창밖으로 보였던 하늘의 풍경들이 하얀 성에 위에 비춰졌다.


창가의 성에를 손끝으로 닦아내며 생각했다. 올 여름 무더웠다고 하지만 난 이 만큼 차가웠던 계절을 지나왔구나 이런 변화는 단순한 계절의 변화가 아니라, 내가 다시 살아가고 있다는 조용한 확인 같았다.


따뜻한 차를 우려내기 위해 주전자에 물을 올렸다. 물이 끓어오르는 소리가 잔잔하게 새벽을 흔들었다.


머그잔에 뜨거운 약초물을 부어 두 손으로 감싸니 온기가 천천히 손바닥과 손가락으로 번졌다. 그 온기가 곧 내 몸의 회복 속도와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는 끓는 순간 완성되지 않는다. 뜨거운 물이 잎을 만나 서서히 우러나오는 찰나의 과정이 있어야 비로소 맛이 난다. 나의 몸도 그랬다. 치료가 끝났다고 바로 회복되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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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과 인내, 조용한 기다림이 필요하다.

차의 맛과 향이 뜨꺼운 물속에 스며드는 것처럼.


그러나 따뜻함 속에서도 불현듯 마음을 흔드는 감정이 있었다. 오늘 아침, 병원에서 내일 예약된 pet-ct검사 알림 문자를 다시 확인했을 때 잠시 스쳐 지나간 재발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몇 달 전, 치료가 끝났음을 통보받았던 순간의 기쁨보다 그 이후의 복잡한 감정이 더 길게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다.


완치라는 단어의 무게는 내게는 아직 멀리 있는 말이다. 병원이라는 공간이 불러오는 특유의 냄새, 하얀 벽, 기다림의 의자, 의사의 표정. 그 모든 것들이 하나의 신호처럼 아직도 내 안의 불안을 건드린다.


그러나 예전과 달라진 점도 있었다. 예전에는 이런 불안이 하루 종일 머물며 내 마음을 흔들었다면, 지금의 불안은 잠깐 스쳐 지나간 뒤 머무르지 않고 흩어진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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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그 두려움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조금씩 배우고 있다는 뜻일 수도 있다.


재발에 대한 불안은 살아 있음의 증거이고, 건강을 잃었다가 되찾은 사람이 겪는 자연스러운 정서일지도 모른다. 나는 이제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오후에는 잠시 집안을 정리했다. 후츄가 언니 집으로 이사한 뒤 집안 공기는 참 많이 달라졌다. 털과 먼지가 사라지고 로봇청소기의 수고가 줄어든 건 확실한 변화였다.


그러나 물리적인 깔끔함과는 다르게 마음 한구석에서는 여전히 자리 하나가 비어 있는 듯한 허전함이 느껴졌다.


후츄는 말 그대로 집 안의 작은 생명이었고, 내가 힘든 시기를 보내는 동안 묵묵히 자리를 지켜주던 존재였다.


아프고 지치던 시절, 병실에서 돌아와 후츄의 눈을 마주 보는 일은 말없이 위로받는 순간이었다.


고양이는 말을 하지 않지만, 사람보다 더 정확한 방식으로 마음의 변화를 알아채는 존재였다.


집이 조용해진 것은 분명 편해진 부분도 있었다. 청소는 쉬워졌고, 털 알레르기도 줄어들었고, 집안이 정돈된 느낌도 들었다.


하지만 그 조용함 속에서 후츄가 없는 공간의 온도가 미묘하게 낮아진 것 같은 감각을 지울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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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츄라는 작은 생명체가 집안의 공기층을 어떻게 바꾸어 놓았는지,

그 작지만 큰 존재감을 새삼 깨닫게 되는 시간이었다.


저녁이 되어 불을 끄기 전, 창밖을 한 번 더 바라보았다. 낮보다 더 차갑고 묵직한 어둠이 깔려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그 어둠이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이 어둠 속에서 다시 한 번 살아있다는 감각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치료가 끝난 뒤의 107일. 그 시간 속에는 불안도 있었고 작은 기쁨도 있었으며, 잊고 싶지 않은 회복의 순간들이 겹겹이 쌓여 있었다.


앞으로의 하루들이 어떤 온도로 찾아올지는 모르지만, 오늘처럼 이렇게 조용히 자신을 들여다볼 수 있다면 두려움도 결국 지나가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일은 새벽 첫차를 타고 동대구에서 수서역으로 무겁지만 가볍게 또는 가볍지만 무거운 여정의 발걸음을 옮겨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회복 중이고 여전히 두려움과 공존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전보다 더 단단해진 마음으로 오늘을 건너고 있다.


오늘도 그렇게 하루가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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