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1.미완성의 결과가 오히려
마음편했던 하루.

by 마부자


강한 바람과 함께 밀도 높은 차가운 공기가 가득한 하루였다. 하늘의 해는 찾아 볼 수 없었고 잔뜩 흐린 구름과 뒹구는 낙엽들이 가득한 풍경의 겨울이었다.

autumn-9936657_1280.jpg?type=w1

아내는 올해 마지막 볼링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아침일찍 서둘러 집을 나섰고, 늦은 시간까지 알바를 마치고 돌아온 막내는 아직 한밤중을 보내고 있었다.


여느 평일보다 더 조용한 아침 책상 앞에 앉았다. 몸의 회복 속도만큼 계절도 조금씩 다음 장으로 넘어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예전 같았으면 아무 의미 없이 흘려보냈을 변화들이 요즘은 유난히 또렷하게 다가온다. 하루를 어떻게 보내느냐보다, 하루를 어떤 마음으로 통과하느냐가 더 중요해진 시기다.


오전에 나의 첫번째 인생 책인 소로우 <월든>의 마지막 장을 넘기며 독서를 시작한 뒤 처음으로 드는 두가지 느낌으로 인해 이 책은 더 나를 흔들기 충분했다.


첫째로 <월든>을 한번 읽고 나서 과연 내가 소로우가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것을 이해했다고 할 수있을까? 하는 의문이었다.


초겨울 바람에 이러저리 흩날리는 낙엽처럼 책장을 넘긴 내가 200년전 자연으로 돌아가 무소유의 삶을 살고자 했던 소로우의 마음을 글로 적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둘째로 거의 모든 단락을 두번씩 읽었던 것 같은 기억이었다. 어떤 문장은 한겨울 눈보라처럼 차갑게 정곡을 찌르기도 하지만, 또 어떤 문장은 봄날의 하늘처럼 따뜻했다.


어떤 문장은 한여름 모래사장처럼 서있지도 못할만큼 뜨거웠고, 또 어떤 문장은 가을의 여유로움을 담은 듯 선선하게 다가왔다.

boat-8332114_1280.jpg?type=w1

마치 소로우의 문장 속에는 사계절의 모두 담겨있는 듯 했고, 월든 호수라는 곳을 가보지 않았지만 이미 내 머릿속에는 월든 호수가 눈에 그려져 있었다.


이제껏 서평을 작성하는 그 어떤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그러나 막상 오히려 쓸 말이 없다는 것도 이 책의 묘한 매력이라고 할까.


쓰면 쓸수록 쓸말이 많고 줄이자고 마음먹으면 또 함축되어 쓸말이 없는 묘한 아이러니를 담은 그런 책이었다.


책을 덮고 난 뒤, 한동안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채 앉아 있었다. 무언가를 더 붙잡고 싶었지만, 동시에 아무 말도 보태지 않는 것이 이 책에 대한 가장 솔직한 태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회복의 시간도 그렇다. 빨리 좋아지고 싶다는 마음보다, 지금의 상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일이 더 어렵고 더 중요하다는 것을 나는 이 책을 통해 다시 배운다.


투병 이후의 삶은 이전보다 훨씬 느리게 흘러간다. 하지만 그 느림 속에서 나는 비로소 내 삶의 밀도를 가늠하게 된다.


무엇을 더 가질 것인가가 아니라, 무엇을 덜어내고도 살아갈 수 있는지를 묻는 시간.


월든은 자연 속의 이야기였지만, 지금의 내게는 몸과 마음을 다시 정리하는 또 하나의 호수처럼 다가왔다.

keyboard-5612706_1280.jpg?type=w1

서평을 작성하고 포스팅 시간을 예약했지만 내 마음의 서평은 아직 완성하지 못했다.


그 미완성의 상태가 오히려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모든 생각을 한 번에 정리하려 애쓰지 않아도 된다는 허락을 스스로에게 내린 기분이다.


어쩌면 이 책은 읽는 동안보다 덮은 뒤에 더 오래 곁에 머물러야 하는 책인지도 모르겠다. 지금의 나는 답을 적어내려 가는 사람이라기보다, 질문을 품고 살아가는 쪽에 더 가깝다.


오전 내내 책과 서평을 쓰며 시간을 보냈다. 아내는 마지막 시합에서 특별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며 아쉬움에 집으로 돌아왔다.


막내는 오늘도 알바를 간다며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이른 저녁을 챙겨 먹고 현관을 나섰다. 휴일을 휴일처럼 보낸 하루였다.


내일은 지난 10일에 했던 핵의학검사의 결과를 들으러 다시 병원에 가는 날이다. 치료를 마치고 회복의 시간을 지나, 처음으로 주치의를 다시 만나는 날이기도 하다.


이상하게도 검사를 받으러 가던 날보다 결과를 듣는 내일이 훨씬 더 무겁다. 수십 배, 수백 배는 더 긴장되고 초조한 마음이 앞선다.


며칠 전부터 몸이 조금씩 아프기 시작했다. 참을 수 없는 통증도 일상을 멈출 만큼의 고통도 아니었다.

sadness-6759823_1280.jpg?type=w1

그래서 이건 몸이 아픈 것이 아니라 마음이 먼저 반응하고 있다는 신호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정신이 먼저 아파오고 있었다.


그제부터 한동안 잠잠하던 입술에 수포가 올라왔다. 목은 따끔거렸고, 잠자리에 누워도 쉽게 잠들지 못했다. 결국 어제는 진통제를 먹은 뒤 잠이 들 수 있었다.


눈을 감으면 별다른 상상도 하지 않는데 심장은 괜히 바빠졌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몸은 이미 대비 태세에 들어간 듯했다.


아마 내일 결과를 듣기 전까지는 이 증상들이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몸은 기억하고 있었고, 나는 그 기억을 애써 외면하며 살아왔다는 사실도 함께 알게 되었다.


회복은 분명 진행 중이지만, 두려움까지 완전히 회복되는 데에는 시간이 더 필요한 모양이다.


그래도 나는 내일 병원에 갈 것이다. 두려움을 없애기 위해서가 아니라, 두려움을 안은 채로도 걸어갈 수 있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증명하기 위해서.


결과가 어떻든, 오늘의 이 긴장과 불안마저 내 회복의 일부라고 생각하며 나는 조용히 내일을 향해 숨을 고른다.


회복도 독서도 마찬가지다. 완결보다 과정에 머무르는 시간.

오늘은 그 미완성 그대로를 안고 하루를 마무리한다.





이전 19화12.20.아들의 첫번째 차 구매에 함께 했던 소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