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2.병원에서 기다림 보존의 법칙을 발견했다.

by 마부자

병원으로 향하는 무거운 마음을 대변하듯, 거센 바람과 한기가 체감을 끌어내린 한파주의보가 발령된 도시의 새벽은 유난히 차갑게 느껴졌다.


몸보다 마음이 먼저 움츠러드는 아침이었다. 오늘은 유난히 숨을 고르며 발걸음을 옮기게 되는 날이었다.


지난 10일 검사를 받으러 올라갈 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연말이 다가와서인지 플랫폼에는 제법 많은 사람들이 서 있었고, 정장을 입은 직장인들이 눈에 띄게 많았다.


그들이 삼삼오오 나누는 송년모임 이야기 속에서, 나는 자연스럽게 과거의 나를 떠올렸다. 매년 이맘때면 나 역시 본사인 인천으로 향하곤 했다.

conference-7693055_1280.jpg?type=w1

내년도 사업계획, 종무식,

보고서와 회의가 줄지어 있던 시절이었다.


30년 동안 비슷한 계절, 비슷한 장소에 서 있었지만, 지금의 나는 전혀 다른 이유로 같은 곳에서 기차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이 마음을 더 서늘하게 만들었다.


기차가 출발하고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다가 문득 하나의 단어가 마음에 걸렸다.


요즘 내 안에서 자주 고개를 드는 감정, 아마 평생을 따라다닐지도 모를 그 단어는 바로 ‘후회’였고 그 생각을 짧은 글로 작성을 했다.


수서역에 도착해 플랫폼에 내리자 사람들의 발걸음이 눈에 띄게 빨라졌다. 대부분 병원 셔틀버스를 타기 위해서라는 것을 이제는 몸으로 안다.


나 역시 잰 걸음으로 3번 게이트를 향했지만, 이미 버스 앞에는 긴 줄이 늘어서 있었고 다음 차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첫 진료는 방사선종양학과였다. 예약시간보다 10분 늦게 도착했지만 대기실은 이미 사람들로 가득했다.


결국 한 시간을 기다린 끝에 의사를 만났고, 짧지만 단단한 한마디를 들을 수 있었다.

medical-equipment-4099428_1280.jpg?type=w1

검사 결과는 상당히 좋고,

전이나 재발의 소견은 없습니다.


걱정하지 말라는 말과 함께 관리를 잘하고 3개월 후에 다시 보자는 말은 지난 나의 걱정을 말끔히 잊게 해주었다. 또한 이제는 음식을 가리지 않고 먹어도 된다는 반가운 소식도 함께 들었다.


회나 육회 같은 날음식도 괜찮고, 커피도 마셔도 된다는 말에 마음이 먼저 풀렸다. 조심스럽게 술 이야기를 꺼냈지만, 의사는 웃으며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다만 술은 안 되지만, 무알콜 맥주 정도는 괜찮다는 말이 뒤따랐다. 솔직히 가끔 무알콜을 마시긴 했는데 이제는 괜히 죄책감을 안고 마시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작은 자유처럼 느껴졌다.


오후 1시 50분, 두 번째 진료인 이비인후과 앞에서 딸과 함께 대기했다. 딸은 지난 주말 서울에서 친구들을 만난 뒤 삼성역에서 합류했다.


곁에 앉아 있는 딸의 존재만으로도 긴장은 한결 누그러졌다.


편도암의 메인 주치의는 정말 바쁜 분이다. 오늘도 늘 그렇듯 서서 진료를 했다. 결과가 매우 좋고, 암세포는 모두 사라졌으며 3개월 후에 다시 보자는 말만 남기고 바쁘게 자리를 뜨려 했다.


나의 짧은 질문에 심한 목마름은 방사선 치료 후 흔한 증상이라 시간이 필요하고, 치과 발치는 치료 후 1년이 지나야 가능하다는 설명을 들었다.


더 묻고 싶은 말이 있었지만, 경과가 좋은 환자인 내가 오래 붙잡는 건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감사한 마음으로 진료실을 나왔다. 밖에는 나보다 더 긴 시간을 기다리고 있는 많은 환자들이 있었다.

%EC%9D%B8%EA%B0%84%EA%B4%80%EA%B3%84%EB%A1%A0_(98).png?type=w1

이 자리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받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 번째 진료는 혈액종양학과였다. 늘 대기가 길어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했지만, 오늘은 예상보다 빠르게 이름이 불렸다.


다시 한 번 비슷한 검사 결과를 확인하며, 내가 진단받은 양성 편도암은 방사선 효과는 좋았지만, 발견 당시 기수(당시 편도암 3기)가 높았기에 1~2년은 재발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관리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경고라기보다는 당부처럼 들렸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 말을 마음속에 새겼다.


모든 진료를 마치고 보니 오후 2시 30분이었다. 예상보다 한 시간이나 빨리 끝난 일정에 딸과 함께 무인수납기로 향했다.


그러나 CT 검사는 별도로 예약하라는 안내가 화면에 떴다.


원무과에 문의하자 번호표를 받고 기다리라는 답이 돌아왔다. 대기 인원은 40명이었다.조금 전의 기쁨은 금세 사라지고, 병원이라는 공간이 가진 특유의 시간감각이 다시 나를 붙잡았다.


30분을 기다려 창구에 섰지만, 이미 예약은 되어 있으니 그냥 가면 된다는 말이 돌아왔다. 아까와 다른 설명에 잠시 마음이 상했지만, 병원에서의 감정 소모는 늘 나만 손해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EC%9D%B8%EA%B0%84%EA%B4%80%EA%B3%84%EB%A1%A0_(176).png?type=w1

딸과 함께 셔틀버스를 타러

이동하며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내 이야기를 들은 딸은 병원에는 꼭 일정 시간만큼의 기다림을 강제로 채우는 ‘기다림 보존의 법칙’이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기다림 보존의 법칙’이라는 딸의 말이 농담처럼 들리면서도 이상하게 마음에 오래 남았다.


병원이라는 공간에서는 누구도 기다림을 피할 수 없고, 빨리 끝난 만큼 다른 곳에서 반드시 시간을 채우게 되는 구조처럼 느껴졌다.


마치 삶이 공평을 맞추려는 것처럼 말이다.


생각해보면 치료의 과정 내내 나는 늘 기다리고 있었다. 검사 결과를 기다리고, 진료실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회복이라는 단어가 현실이 되기를 기다렸다.


그 기다림은 늘 불안과 함께였지만, 동시에 나를 단단하게 만드는 시간이기도 했다.


그래서 이제는 기다림을 억울함으로만 보지 않으려 한다. 오늘의 기다림이 어쩌면 내 몸과 마음이 회복을 따라갈 수 있도록 속도를 조절해주는 장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soil-8080788_1280.jpg?type=w1

‘기다림 보존의 법칙’은

서두르지 말라는 삶의 방식일지도 모른다.


오늘 하루도 결국 나는 많은 것을 기다렸고, 그 기다림 끝에서 좋은 소식을 받았으며, 다시 기다려야 할 시간을 안고 집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예전과 다른 점이 하나 있다면, 이제 나는 기다림이 끝나지 않는 형벌이 아니라 삶의 일부라는 것을 조금은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오늘의 기다림은, 분명히 내일을 조금 더 가볍게 만드는 쪽으로 쓰일 것이다.


모든 일정을 마치고 동대구에 도착하니 어느새 오후 7시가 넘어 있었다. 아침 6시에 집을 나선 뒤 꼬박 12시간을 밖에서 보낸, 길고도 무거운 하루였다. 몸보다 마음이 먼저 집을 찾고 있었다.


딸과 역사 앞에서 인사를 나눴다. 평소 같으면 함께 집으로 가 저녁을 먹었겠지만, 오늘은 서로 말없이 쉬자는 선택을 했다. 돌아서는 딸의 뒷모습에 피로가 어깨처럼 얹혀 보였다.


잘 자라고, 조만간 맛있는 거 먹자고 큰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그 말이 딸에게도, 나에게도 작은 위로가 되었기를 바라며 집으로 향했다. 오늘은 충분히 견뎌낸 하루였다.





이전 20화12.21.미완성의 결과가 오히려 마음편했던 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