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지가 지나 밤과 낮의 길이가 같아졌다고 하지만, 이른 새벽의 하늘은 여전히 밤에 더 가까웠다.
창밖은 고요했지만 매서운 찬바람은 어둠을 데리고 창문 틈을 비집고 들어와 베란다를 지나 거실까지 흘러들었다.
그 차가운 공기 속에서 나는 하루의 시작을 다시 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거실에서 짧은 명상을 마치고 따뜻한 차 한 잔을 들었다. 손끝으로 전해지는 온기가 유난히 또렷했고, 그 온도 덕분에 내가 지금 여기에 있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책상 앞에 앉아 오늘부터 나의 생각을 도와줄 한 권의 책을 펼쳤고 ‘진실’이라는 단어에 대해 천천히 글을 써 내려갔다.
눈에 보이는 것이 진실이라 믿어왔지만 그 진실 뒤에 또 다른 진실이 숨어 있다는 생각은 아이러니를 넘어 모순처럼 느껴졌다.
진실이라는 단어가 점점 힘을 잃어가는 시대를 살고 있다는 자각이 이른 새벽의 공기처럼 차갑게 가슴에 내려앉았다.
괜히 씁쓸해져 잠시 자판에서 손을 내려놓고 숨을 고르기도 했다.
어제 하루 종일 병원에 있었지만 오늘도 다시 병원을 향해야 했다. 치과와 신경외과 진료가 예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몸은 아직 병원이라는 공간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먼저 치과에 들러 총 일곱 개의 치아에 치료가 필요하다는 설명을 들었고, 오늘은 가장 시린 두 개부터 치료하기로 했다.
가장 상태가 심한 치아는 발치를 권했지만 암병원 주치의의 소견에 따라 치료 후 1년 동안은 발치를 하지 않기로 했다.
치과 의자에 누워 얼굴을 가리는 푸른 천이 씌워지는 순간, 심장은 늘 그렇듯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모터 소리와 함께 이를 가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몸은 본능처럼 바짝 굳어버렸다.
치료를 마치고 병원에 비치된 정수기 앞에 섰다. 종이컵에 찬물을 따라 조심스럽게 한 모금 마셔봤다.
이를 스치는 차가움이 느껴졌지만, 예상했던 시림은 없었다. 조심스레 한 컵을 더 따라 이번에는 꿀꺽꿀꺽 마셨다. 그래도 시리거나 아프지 않았다.
이렇게 아무 걱정 없이 찬물을 마신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한때 얼죽아를 외치던 내가 몇 달 동안 따뜻한 음료만 찾을 수 밖에 없었다.
겉으로는 항암 때문이라고 스스로를 설득해왔지만 사실은 시린 이를 피하기 위한 선택이었음을 오늘에서야 솔직히 인정하게 됐다.
기분이 한결 가벼워진 상태로 같은 건물에 있는 신경외과로 이동했다. 의사가 경과를 묻자 나는 웃으며 많이 좋아졌다고 말했다.
두 번의 주사를 맞은 뒤 어깨와 오른쪽 날개뼈 근처를 괴롭히던 통증이 눈에 띄게 사라졌기 때문이다.
지난 2년 동안 원인을 알 수 없는 통증에 시달렸던 시간을 떠올리면 지금의 상태는 마치 명의를 만난 것 같은 회복에 가까웠다.
이번 치료 이후 두 주 정도 지켜보고 증상이 계속 호전되면 추가 주사는 필요 없다는 말을 들었다. 꾸준한 물리치료만 잘 받으면 된다는 소견이었다.
두 곳의 병원 진료를 모두 마치고 집에 돌아오니 오후 두 시가 조금 넘었다.
어제와 오늘,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병원에서 보냈다. 소독약 냄새와 아픈 사람들, 회복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한숨이 뒤섞인 공간에서 보낸 이틀이었다.
그럼에도 이 이틀이 유난히 다르게 느껴진 이유는 분명했다. 병원을 오가며 나는 모두 ‘회복’이라는 결과를 하나씩 손에 쥐고 돌아왔기 때문이다.
병원이라는 공간이 늘 불안과 긴장의 장소였던 나에게, 이 이틀은 예외처럼 조용히 방향을 바꿔주었다.
치료실과 진료실을 옮겨 다니며 듣게 된 말들은 경고가 아니라 확인에 가까웠다.
잘 지나왔다는 말, 좋아지고 있다는 말, 더 나빠지지 않아도 된다는 말들이 차곡차곡 쌓였다.
그 말들은 처방전보다 오래 남아 마음의 통증을 먼저 낮춰주었다.
회복은 단번에 완성되는 결과가 아니라는 것을 나는 이제 안다. 이틀 동안 손에 쥔 것은 완치가 아니라, 다시 믿어도 되겠다는 작은 확신이었다.
그리고 그 확신 하나만으로도 오늘의 나는 병원을 나설 때보다 훨씬 가벼운 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이틀 동안 얻은 이 작은 회복들의 목록은 그 어떤 날보다도 내 마음을 단단하게 만들었다.
하나하나 떼어놓고 보면 사소한 변화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나에게는 분명히 방향을 가리키는 표지판들이었다.
아프지 않다는 사실보다, 덜 두려워졌다는 감각이 먼저 나를 안심시켰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분명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증거들이었다. 되돌아가지 않고, 멈추지 않았으며, 최소한 제자리에 머물러 있지도 않다는 확인이었다.
회복은 늘 조용히 다가와서 이렇게 뒤늦게 자신의 존재를 증명한다는 것도 오늘에서야 알게 되었다.
오늘의 나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희망을 느낀다. 큰 각오나 다짐이 아니라, 오늘을 무사히 통과했다는 감각만으로도 마음이 차분해진다.
아직 길은 남아 있지만, 적어도 이틀 전의 나보다는 분명히 조금 더 건강한 방향에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