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4.책을 읽지 않아도 괜찮았던
별마당 도서관에서

by 마부자

며칠 전 삼성병원에 갔을 때 첫 진료는 오전 9시 45분이었고 두 번째 진료는 오후 1시 50분이었다.


병원이라는 공간에서 그 긴 시간을 고스란히 견디는 일은 이제 더 이상 미덕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기다림 총량의 법칙을 떠올리며 아무리 마음의 준비를 해도 두 시간 넘는 공백을 병원 안에서 보내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대구 촌넘이 서울 구경이라도 제대로 해보자며 딸에게 미리 알아봐 달라고 했고, 책 좋아하는 아빠를 떠올린 딸은 망설임 없이 별마당도서관을 이야기했다.


그 말 한마디에 병원의 무거운 공기가 조금 옅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병원 셔틀을 타고 일원역에 내려 지하철로 이동했다. 도곡역에서 환승을 해야 했지만 일부러 도보를 택했고, 미리 알아둔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인스턴트를 피하고 있는 나를 위해 딸은 토마토가 들어간 라멘집을 골라주었다. 한국에서 일본식 라멘을 처음 먹는 것도 낯설었는데 토마토 국물은 더 생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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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가슴살과 계란이 올라간 그릇을 보며 이 정도면 몸에게도 덜 미안한 음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색다른 맛이었지만 국물은 의외로 부드러웠고 쿠폰으로 받은 밥까지 말아 조용히 비워냈다.


도곡역에서 삼성역까지 다시 걸었다. 날씨는 유난히 차가웠지만 딸과 나란히 걷는 낯선 서울의 길은 이상하게도 따뜻하게 느껴졌다.


추위보다 대화의 온기가 더 크게 다가오는 순간들이 분명히 있었다.


삼성역에 도착해 코엑스 입구에서 딸과 인증샷을 찍고 별마당도서관으로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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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알고 있던 도서관의 풍경과는 전혀 다른 공간 앞에서 잠시 말문이 막혔다.


조용한 사색의 장소 대신 거대한 트리와 사람들로 가득 찬 풍경이 먼저 나를 맞았다.


도서관이라기보다 거대한 쇼핑몰 한가운데 서 있는 기분이었다. 트리 앞에는 인증샷을 찍기 위한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고, 그 뒤로 별마당도서관이라는 글자가 보였다.


크리스마스를 앞둔 공간은 알록달록한 장식으로 가득 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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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식인 줄 알았던 책들은 실제로 꺼내 읽을 수 있는 책들이었다. 다만 그 자리에 오래 머물러 책을 읽기엔 분위기가 허락하지 않는 공간이라는 것도 금세 알 수 있었다.


안으로 더 들어가자 시선이 자꾸 위로 끌려 올라갔다. 바닥에서 천장까지 곧게 뻗은 서가들은 책을 정리하기보다는 이 공간의 높이와 규모를 보여주기 위한 하나의 풍경처럼 느껴졌다.


책은 읽히기보다 먼저 보이도록 배치되어 있었다. 서가 사이사이에는 의자가 거의 없었고 사람들은 멈춰 서서 책등을 훑어보거나 잠시 책을 꺼냈다가 다시 제자리에 꽂아두는 정도였다.


오래 머무르기보다는 스쳐 지나가게 설계된 공간이라는 인상이 강했다. 중앙은 탁 트여 있었고 그 빈 공간을 사람들의 동선이 채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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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아래를 오가는 에스컬레이터는 도서관의 일부라기보다는 이곳이 여전히 쇼핑몰의 한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상기시켰다.


책과 소비의 경계가 희미하게 겹쳐 보였다. 곳곳에서 카메라 셔터 소리가 났고 외국어가 섞인 대화들이 공기처럼 흘렀다.


누군가는 트리를 배경으로 서 있었고 누군가는 서가를 배경 삼아 자신의 얼굴을 남기고 있었다.


책은 그 모든 장면의 배경이 되어 조용히 서 있었다. 나는 이곳이 독서의 공간이라기보다는 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무대 같다는 생각을 했다.


책을 깊이 읽지 않아도 괜찮고 그저 책 곁을 지나쳤다는 경험만으로도 이 공간은 제 역할을 다하고 있는 듯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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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딸에게 물었다.

이래서 도서관이라는 이름이 과연 맞는 걸까? 딸은 웃으며 도서관에 대한 이야기를 하나 들려주었다.


원래 도서관은 햇빛이 직접 들지 않는 곳에 지어야 한다고 했다.


빛을 받으면 책이 바래기 때문에 그늘진 공간이 도서관의 조건이었지만, 요즘 사람들은 그런 도서관에 잘 가지 않기에 이 별마당도서관이 하나의 해답이 되었다고 했다.


2017년에 문을 열었고 약 7만여 권의 책과 잡지를 무료로 열람할 수 있는 공간으로 운영되고 있다고 했다.


천장까지 이어진 대형 서가와 자연광 대신 실내 조명을 활용한 구조는 전통적인 도서관의 조건을 의도적으로 벗어난 설계라고 한다.


책을 보호하는 공간이기보다 책을 노출시키고 사람을 끌어들이는 데 목적을 둔 공간이라는 설명이 더 어울렸다.


이곳은 조용히 앉아 오래 책을 읽는 장소라기보다는 책이라는 매개를 통해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머물고, 사진을 찍고, 잠시 관심을 갖게 만드는 문화 공간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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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홍보하기 위해 공간을 바꾸었고, 그 결과 이곳은 핫플레이스가 되었다는 설명이었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들으며 요즘 세대의 감각과 정보력에 새삼 감탄했다.


동시에 나 역시 세월을 꽤 먹었다는 사실도 조용히 받아들이게 되었다.


딸과 사진을 몇 장 더 찍고 내부를 둘러본 뒤 다시 병원으로 향했다.


예전에는 서울을 출퇴근하듯 오가며 늘 시간에 쫓겼지만, 오늘처럼 느긋하게 점심을 먹고 거리를 걸어본 기억은 거의 없었다.


대치동과 도곡동, 삼성동의 한복판을 걸으며 나는 내 삶의 속도를 떠올렸다. 얼마나 빠르게만 살아왔는지, 얼마나 많은 풍경을 그냥 지나쳐왔는지를 생각하게 되었다.


병이라는 사건이 나를 멈춰 세우고 비로소 걷게 만들었다는 사실이 마음에 남았다.


오늘의 서울은 치료의 중간에 잠시 끼어든 선물 같은 시간이었고, 딸과 함께였기에 더 오래 기억될 하루였다.


나는 다시 병원으로 돌아가면서도 이 느린 걸음만큼은 쉽게 놓아주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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