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트 크리스마스는 아니었지만 차가운 바람이 밀려드는 어두운 새벽은 금방이라도 눈이 내릴 것만 같은 냉기를 품고 있었다.
잠시 서재의 창문을 조금 열었다. 차가운 공기가 방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숨을 들이마시는 일이 예전처럼 조심스럽지 않았다.
비록 지금은 냉담중이지만 한 때는 모태신앙을 가졌던 크리스챤으로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잠시 눈을 감고 짧은 명상을 했다.
문득 그 명상 뒤에 나에게 남는 하나의 단어가 스쳐지나갔고 어둠이 내려앉은 새벽에 ‘구원’이라는 단어에 대한 글을 적어보았다.
세상의 구원이 아닌 나를 위한 구원의 삶을 살았던 올 한해였다. 그래서 지금 이순간 숨이 막히지 않는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고마웠다.
크리스마스라는 이름보다 이 공기의 온도가 더 선명하게 남았다.
아침 식사는 특별하지 않았다. 늘 먹던 대로 계란두개와 야채쥬스 그리고 엔커버 하나 맛이 대단해서가 아니라 무리 없이 넘길 수 있다는 사실이 마음을 편하게 했다.
아내와 막내는 아직 잠자리에 들어있고 혼자 밖으로 잠시 나섰다. 아파트 입구에는 크리스마스트리와 전구들이 여전히 반짝이고 있었다.
화려하지도 과하지도 않았다. 이른 아침 사람들의 발걸음도 어딘가 느슨해 보였다. 예전 같았으면 그 풍경에 들떴을 텐데 오늘은 그저 조용히 지나쳤다.
그런 거리의 온도가 지금의 나와 잘 맞았다.
집에 돌아오기 전 까페에 들러 까페라떼 한잔을 주문했다.
까페에는 커다란 산타모양의 인형이 반짝이며 크리스마스를 빛내주고 있었다.
예전에는 거리에 반짝이는 트리도 많이 있었는데 요즘의 거리에는 작은 장식도 멜로디도 없는 여느 때와 같은 거리의 풍경이 조금은 씁쓸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까페안에서 캐럴이 흘러나왔다. 의식하지 않아도 귀에 들어오는 멜로디였다. 특별히 감동적이지도 않았지만 나도 모르게 캐롤을 따라 부르게 되었다.
배경으로 흐르는 음악이 하루를 서두르지 않게 만들어 주는 듯 오랜만에 흥겨운 멜로디와 함께 휴식 같은 시간을 보내고 집으로 돌아왔다.
휴대폰에 알림이 하나 떴다. 짧은 크리스마스 인사였다. 길지 않은 문장이었지만 마음은 충분히 전달되었다. 많은 말을 주고받지 않아도 서로의 안부를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 괜히 따뜻했다.
오후에는 잠깐 눈을 붙였다. 깊게 잠들었다. 통증 때문에 깨지 않았고 불안 때문에 뒤척이지도 않았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 잠들기 전과 같은 몸 상태라는 사실이 무엇보다 좋았다. 이 깊이가 지금의 회복을 말해 주는 것 같았다.
책을 조금 읽었다. 크리스마스와 어울린다고 생각해서 선택한 동화였지만 그 내용은 마음이 아픈 이야기였다.
그래도 다만 문장이 잘 읽혔다. 몇 쪽을 넘기는 동안 생각이 복잡해지지 않았다. 읽는 속도와 마음의 속도가 비슷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해가 빠르게 졌다. 오후가 되자 금세 어두워졌다. 창밖을 보며 하루가 조용히 접혀 간다는 생각을 했다. 오늘은 잘 접혔다. 구겨진 부분도 없었다.
의식적으로 몸을 한 번 더 살폈다. 어디가 아픈지, 불편한 곳은 없는지 천천히 느껴봤다. 크게 거슬리는 곳이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혼잣말로 “오늘은 괜찮네”라고 말했다. 그 말이 스스로에게 주는 작은 확인처럼 느껴졌다.
하루를 정리하며 생각했다. 오늘은 정말 특별한 일이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사실이 허전하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 한가운데가 조용히 채워져 있었다. 크리스마스에 받은 가장 큰 선물은 아무 일 없이 지나간 하루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하루를 보낼 수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 충분한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