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이라는 단어에 대해
그런 생각을 했다.

by 마부자

크리스마스의 새벽은 유난히 고요하다. 저 멀리 거리의 트리 불빛이 아직 꺼지지 않은 베란다의 풍경을 지나 책상 앞에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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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내려왔다는 한 아기의 탄생을 떠올리며 잠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 고요 속에서 나는 오늘 ‘구원’이라는 단어를 꺼내 들었다.


구원이라는 말은 오래도록 종교의 언어로 내게 남아있었다. 믿음의 대상이 있고 믿는 이가 있으며 그 사이에 약속처럼 놓인 단어였다.


그러나 책상 앞에 앉은 지금의 나는 그 말을 조금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고 싶어졌다. 삶의 언어로 번역된 구원 말이다.


구원.

1. 어려움이나 위험에 처한 사람을 구하여 도움.

2. 종교적, 철학적 의미로 영혼이나 삶을 고통에서 건져내는 것.


사전은 구원을 위험이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함이라고 적고 있다. 문장은 단정하지만 실제 삶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우리는 대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채 살아간다. 다만 조금 덜 아프게 숨 쉬고 조금 더 오래 버티며 하루를 넘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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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 예수의 탄생이 상징하는 구원은

단번에 모든 것을 바꾸는 기적처럼 보인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나는 그 기적이 하루의 태도에서 시작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구원은 한 번의 사건이 아니라 반복되는 선택일지도 모른다.


병을 겪으며 나는 구원이라는 단어를 몸으로 다시 배우기 시작했다. 완치라는 결과가 오기 전에도 구원은 찾아왔다.


통증이 조금 줄어든 아침이 구원이었고 잠을 한 시간 더 잔 밤이 구원이었다. 그리고 오늘은 버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던 바로 그 순간이 내겐 구원이었다.


그때 나는 알았다. 구원은 거대한 출구가 아니라 숨이 막히는 방에 생긴 작은 환기창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당장 나가지는 못해도 공기가 바뀌는 순간이 있다. 그 공기를 들이마시는 일만으로도 하루는 다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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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종종 구원을 외부에서 찾는다.


누군가 나를 건져주기를 바라고 어떤 사건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그러나 기다림이 길어질수록 삶은 마비된다. 구원이 오기 전까지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착각에 빠진다.


그런 의미에서 어쩌면 구원은 고통이 사라지는 순간이 아니라 고통과 함께 살아가는 기술일지도 모른다.


고통이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이 나의 전부가 되지 않도록 거리를 둘 때 삶은 다시 움직인다.


크리스마스의 의미도 그 지점에 닿아 있다고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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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완벽한 왕이 아니라

가장 연약한 모습으로 세상에 나타났다.


그리고 그는 세상을 단번에 바꾸지 않았다. 다만 인간의 자리로 내려와 함께 숨 쉬는 방식을 선택했으며 바로 그 선택이 구원이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함께 숨 쉬며 살아간다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다. 타인의 고통을 바로 이해할 수 없고 내 고통조차 설명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같은 시간 속에서 하루를 건너간다. 이 함께의 선택이 구원의 다른 이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래서 나는 이제 구원을 기다리지 않는다. 대신 오늘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작은 회복의 행동을 찾는다.


따뜻한 차 한 잔을 마시고 몸이 허락하는 만큼만 움직이며 내일의 불안을 오늘로 끌어오지 않기로 마음먹는다.


이런 선택들은 세상을 구원하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오늘의 나를 살리게 되고 오늘의 내가 살아남을 때 내일의 가능성도 함께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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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바로 내가 생각하는 구원이다.


크리스마스 새벽에 떠올린 구원은 결국 나에게 이런 메시지를 건넨다. 너는 이미 완전히 무너지지 않았고 아직 선택할 수 있으며 오늘을 건너갈 힘이 남아 있다는 사실.


이 사실을 잊지 않는 것이 구원에 가장 가깝다.


나는 ‘구원’이라는 단어에 대해 그런 생각을 했다.

구원이란 세상을 바꾸려 애쓰기 전에 나 스스로를 살리기로 선택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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