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9.숨긴 시간 위에서 피어나는
아름다운 미소

by 마부자

낯선 인천의 이른 새벽 공기는 대구보다 더 무겁고 어둡게 느껴졌다. 전날 밤 내린 겨울비가 대지를 적신 뒤라 공기는 차가웠고 어둠은 짙었다.


하루가 시작되기 전의 이 공기는 늘 사람의 마음을 안쪽으로 끌어당긴다.


전날 밤 우리는 오랜만에 가족끼리 간단한 오락을 했다. 새벽이 되어서야 자리를 정리했을 만큼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지갑 속 현금까지 어머니에게 모두 내어주고 나서야 밤이 끝났다는 실감이 들었다. 그러나 이 오락의 최종 승자는 늘 그렇듯 막내였다.


몇 시간을 꼼짝없이 앉아 오른팔에 쥐가 날 만큼 애쓴 세 사람에게 남은 것은 통증뿐이었고 구경만 하던 막내의 지갑만 두툼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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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배였지만 웃음이 먼저 나왔다.


아내는 연가를 냈고 막내는 부모동행학습을 신청해 하루를 쉬기로 했다. 덕분에 우리는 늦은 아침까지 잠을 자고 서두르지 않고 대구로 내려갈 수 있었다.


치료 이후 나는 속도를 늦추는 선택을 더 자주 하게 되었다.


늦은 아점을 위해 식탁에 모였을 때 세 사람의 얼굴에는 피로가 남아 있었지만 막내만은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그 웃음 하나가 식탁의 분위기를 바꾸었고 피곤함보다 웃음이 먼저 번지는 순간이었다.


식사가 끝나자 어머니는 준비해 두신 것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쌀과 양념게장, 동치미와 국수, 떡과 진미채, 땅콩까지 끝이 없었다. 수건과 양말, 달력과 옷까지 더해지며 짐은 점점 늘어났다.


올라올 때는 늘 빈손이었지만 내려갈 때는 양손이 부족해진다. 이 반복되는 장면은 어머니의 마음을 설명하는 가장 간단한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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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로 하지 않아도 몸으로 전해지는

사랑이라는 걸 이제는 분명히 안다.


막내와 어머니는 짧지만 깊은 포옹을 나눴다. 주차장까지 따라 내려오신 어머니는 차가 아파트 입구를 빠져나갈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백미러 속에서 그 모습은 점점 작아졌고 마음 한쪽이 조용히 비워졌다. 아프고 나서 알게 된 사실이 있다. 이런 장면들은 결코 당연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별의 순간마다 의식적으로 장면을 저장하듯 바라본다. 언젠가 꺼내어 나를 지탱해 줄 기억이 되기 때문이다.


지난 삼일 동안 나는 많은 얼굴을 만났다. 투병을 시작하고 치료를 마친 뒤 처음으로 다시 마주한 친구들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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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내가 지나온 시간을 모두 알지 못했고

나는 굳이 자세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우리는 예전처럼 웃고 근황을 나눴다. 사소한 농담과 익숙한 말투 속에서 나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고 있음을 느꼈다.


아픔은 설명하지 않아도 내 안에 충분히 남아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시간이다.


어머니는 여전히 나의 투병 사실을 모르신다. 이 사실은 늘 미안함으로 남아 있다.


아들이 큰 병을 앓았다는 걸 알았다면 어머니는 지금처럼 편안하게 웃고만 계시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다른 생각도 떠오른다. 만약 그 사실을 알았다면 이번 삼일은 이런 분위기로 채워지지 못했을 것이다.


걱정이 앞섰을 것이고 식탁의 대화와 표정도 지금과는 달라졌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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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함과 안도감은 동시에 존재한다.

숨겼다는 죄책감과 지켜냈다는 마음이 겹쳐진다.


이 아이러니한 감정은 투병 이후의 나를 가장 정확하게 설명해 준다. 어느 한쪽만 선택할 수 없는 마음의 상태다.


나는 아픈 시간을 혼자 견뎠고 그 시간을 가족으로부터 잠시 분리했다.


그 선택이 옳았는지에 대한 답은 아직 없다. 다만 어머니의 웃음이 흐려지지 않았다는 사실만은 분명히 남아 있다.


짧았지만 분명히 따뜻했던 3박 4일이었다. 모든 일정을 마치고 대구로 내려오는 길, 고속도로의 날씨는 끝내 개지 않았다.


흐린 하늘 아래 약한 눈발과 빗발이 번갈아 내렸고, 차창 밖 풍경은 속도를 내지 못한 채 묵직하게 흘러갔다.


올라올 때와 마찬가지로 휴게소에 들러 간단한 간식으로 배를 채웠다. 이동의 중간에 잠시 멈춰 서는 이 시간은 목적지보다 과정에 의미를 남긴다.


지난여름 아내가 유난히 먹고 싶어 했던 휴게소표 호떡도 그제야 먹을 수 있었다. 계절이 한참 지나서야 이뤄진 작은 바람이었지만, 그래서인지 더 오래 기억에 남을 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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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싶은 것을 미루지 않아도 되는

지금의 시간이 새삼스럽게 고마웠다.


차 안에서는 자연스럽게 지난 며칠의 장면들이 오갔다. 특별한 사건보다 사소한 웃음과 말들이 반복되었고, 그 회상 덕분에 차 안의 공기는 외부 날씨와 달리 훈훈하게 유지되었다.


같은 시간을 공유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따뜻해지는 순간이었다.


올라갈 때와 달리 고속도로의 흐름은 막힘이 없었다. 충분히 쉬며 내려왔다는 느낌 덕분에 네 시간이 채 되지 않는 시간이 유난히 짧게 느껴졌다.


이동의 질이 하루의 피로를 결정한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어머니가 챙겨주신 음식들을 하나씩 정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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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안에는 음식뿐 아니라

며칠간의 시간과 마음이 함께 담겨 있는 듯했다.


싸온 음식들로 간단히 저녁을 먹고 나서야 오늘 하루를 정리할 수 있었다.


이동과 만남, 대화와 침묵이 겹겹이 쌓인 하루였다.


이렇게 하루를 정리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회복의 증거라는 생각이 들며, 조용히 숨을 고르고 잠자리에 들 준비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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