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07.막내의 깨진 휴대폰 덕분에
얻은 소중한 시간

by 마부자

오늘 오전, 막내가 서재 문을 아주 조용히 열고 들어왔다. 문 여는 속도만 봐도 대충 감이 왔다.


이건 용돈이 필요할 때도 아니고, 간식이 떨어졌을 때도 아니다. 금전적인 사고가 터졌을 때만 나오는, 그 특유의 눈빛이었다.


부모는 이런 눈빛을 평생 세 번만 봐도 박사 학위를 딸 수 있다. 막내는 말없이 휴대폰을 내밀었다. 뒤쪽 액정이 보기 좋게 깨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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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보니 수리비가 약 40만원이라고 했다. 속으로는 ‘조심 좀 하지’라는 말이 자동 완성처럼 튀어나오려 했지만 이미 깨진 유리를 다시 붙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나는 잠시 교육적인 아버지 역할을 연기해 보기로 했다.

“그런데 그게 뭐?” 내가 그렇게 묻는 순간, 서재의 공기가 한겨울 베란다처럼 싸늘해졌다.


막내는 잠시 나를 보더니 죄송함과 당연함이 반반 섞인 얼굴로 말했다.

“수리비는 아빠가 내주셔야 할 것 같아서요.”


나는 최대한 침착하게, 이제는 성인이고 아르바이트도 하니까 이런 건 직접 책임지는 게 맞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그리고 약 3분간의 침묵이 흘렀다.


이 침묵은 평화로운 침묵이 아니라 전운이 감도는 침묵이었다.


막내는 고개를 숙이고 방으로 가며 분명 혼잣말인 척했지만 집 안 전체에 울려 퍼질 만큼 또렷하게 말했다.


“그럼 일본 여행은 그냥 깨진 채로 갈게요.

사진도 못 찍고 혹시나 고장이 나면 연락도 잘 못 드릴 수도 있어요.

그리고 수리비는 대학 입학하고 주실 용돈에서 1년에 조금씩 공제하는 거로 하죠 뭐...”


이건 명실공히 분명한 협박이었다. 잘못을 인정했다는 외피를 쓴, 아주 세련된 협박이었다. 나는 이미 이 싸움에서 졌다는 걸 직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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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본전도 못 뽑고 완패한 기분으로 수리센터 위치를 알아보게 했다. 오늘 오후 가능하다는 말에 막내와 함께 대구 중심가로 향했다.


혹시 모르니 보험이 들어 있을 수도 있다며 확인해 보라고 했는데 사실 이 말에는 나의 마지막 희망이 담겨 있었다.


이 휴대폰도 2년 전, 분실 사고 이후 새로 산 거였고 그때 혹시 몰라 보험을 들었던 기억이 아주 희미하게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렇게 정신없이 원투 스트레이트를 맞았지만 애플 직영 서비스센터가 있는 대구역 롯데백화점으로 가는 길은 오랜만의 외출 덕분에 이상하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막내와 오랜만에 단둘이 나오는 오늘의 외출은 지갑과 기분이 반비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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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담 결과, 뒤 액정 교체 비용은 33만 원이며 수리 시간은 약 3시간이 걸린다고 했다. 휴대폰을 맡기고 백화점을 잠시 둘러보았다.


백화점에 나온 김에 입학하는 막내에게 옷을 사줄까도 생각했지만 대학생 룩은 아빠인 나 보다 누나랑 가는 게 훨씬 효율적일 것 같아 깔끔하게 포기했다.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낼까 고민을 했다. 당구장, 카페 같은 선택지를 지나 나는 자연스럽게 서점을 떠올렸다.


막내에게 제안을 했더니 흔쾌히 동의를 했고 근처를 검색하니 대구역 맞은편에 영풍문고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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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내와 함께 길을 건너 약 200미터를 걸어 서점으로 들어섰다.


서점에 들어선 순간, 내가 마지막으로 실물 서점에서 책을 고른 게 언제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온라인 서점에 익숙해진 탓에 책을 직접 만지는 일은 얼마전 딸과 함께 별마당도서관에서 잠깐이 전부였던 것 같다.


몇 년이 아니라 아마 십 년은 훌쩍 넘었을지도 모른다.


독서를 그렇게 좋아한다고 하면서도 실물 서점을 이렇게 오래 멀리했다는 사실이 조금은 부끄러웠다.


막내와 함께 서점을 돌았고 어떤 책을 읽어볼까 고민을 하다가 문득 어제부터 읽기 시작한 세계문학전집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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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찾았지만 내가 읽고 있는 민음사의 책은 없고 미니판이 있어서 그 책을 들었다.


서점 한쪽에 자리를 잡고 나는 책을 읽고 막내는 오사카 여행 관련된 책을 펼쳤다.


막내와 단둘이 그것도 서점에서 한 시간 넘게 각자 책을 읽는 경험을 하게 될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다.


독서를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나 혼자가 아니라 누군가와 나란히 독서하는 시간이 이렇게 좋을 수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같은 페이지를 읽은 것도 아니고 같은 문장을 공유한 것도 아니었지만 같은 공간에서,


각자의 속도로 책장을 넘기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해졌다.


말 한마디 없었지만 서로 방해하지 않는 그 침묵이 꽤 단단한 대화처럼 느껴졌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나는 혼자 읽는 시간에만 익숙해졌지 함께 읽는 시간의 의미는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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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는 늘 개인의 취미라고 여겨왔는데 이 순간만큼은 혼자여서 완성되는 일이 아니라같이 있어도 충분히 존중받을 수 있는 조용한 동행처럼 느껴졌다.


한 시간 반쯤 지나 다시 서비스센터로 돌아가 결제를 했다. 막내는 새 휴대폰이 된 것처럼 기뻐했고 나는 생돈 33만 원이 빠져나갔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은 꽤 충만했다.


황금 같은 오후를 거리에서 보냈는데 후회는 없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보험을 꼭 확인해 보라고 다시 한 번 말했다.


저녁을 먹고 귀가한 뒤 막내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빠, 보험 들어 있었고요. 수리비 70% 보상된대요.”

그 말만으로도 충분히 다행이었는데 막내는 마지막 결정타를 날렸다.


“근데 보험 만료가 다음 달 2월 6일까지였다네요.

제가 좀 늦게 망가뜨렸으면 큰일 날 뻔했죠? 진짜 다행이지 않아요?”


뭐가 다행이라는 것인지 대체 구분되지 않았고 순간, 저걸 콱 쥐어박을까 하는 생각이 아주 짧게 스쳐 갔다.

하지만 나는 웃으며 말했다.


그래, 네 말이 맞다.

정말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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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이 정도면충분히 웃고 넘어갈 만한 하루다.


오늘 내가 지불한 33만 원 중 가장 값진 부분은 액정 교체비가 아니라 그 서점에서 보낸 한 시간 반의 고요였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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