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차가운 공기를 마시 짧은 명상을 하고 책상에 앉아 공감필법을 읽으며 ‘조건’이라는 단어에 대한 생각을 글로 적었다.
여느 때보다 조금 더 일찍 시작한 하루였다. 글을 다 적었음에도 아직 해는 동쪽 바다에서 산으로 오르기 전 어스름한 어둠이 깔려 있었다.
어제부터 읽기 시작한 세계문학전집을 다시 펼쳐 들었다.
오랜만에 새벽에 집중해서 책을 읽으려고 하니 고개가 천천히 떨어졌다.
분명 졸았다는 사실은 몸이 먼저 알고 있었다. 턱이 가슴 쪽으로 기울어졌고 책 위에 떨어진 시선은 몇 줄째를 헤매고 있었다.
그런데도 페이지를 잡고 있는 손은 한 장씩 자동으로 넘기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마치 정독으로 다 읽은 사람 특유의 태도가 자연스럽게 나왔다.
밑줄도 없고 플래그도 붙이지 않았지만, 마음속으로는 이미 중요한 문장을 하나 건져 올린 기분이었다.
기억은 또렷하지 않았지만 확신은 이쯤이면 읽은 것이며 눈만 잠시 감고 있었을 뿐 독서는 진행 중이었고 잠은 개입하지 않았다고 스스로 판결을 내렸다.
독서와 수면의 경계가 이렇게 느슨해질 줄은 몰랐다.
인간의 기억은 필요할 때마다 편집자가 되어 상황을 미화한다는 나만의 위안을 가진다.
그렇게 인간은 불리한 장면은 과감히 삭제하고 유리한 장면만 남긴다. 아무도 보지 않는데 마치 옆에 누가 지켜보는 냥 말이다.
밝게 떠오른 해와 함께 아내의 기척에 정신을 차리고 잠시 책을 덮었다.
솔직히 책의 내용은 흐릿했지만 태도는 성실했고, 자세는 졸고 있었지만 마음만은 책장 한가운데 있었다고 생각했다.
이렇게까지 애써가며 독서를 지키려는 나를 보며 혼자 웃었다. 독서에 대한 열정이 깊어질수록 잠과의 타협도 점점 교묘해지고 있다.
아내를 보내고 결국 새벽 졸음과 사투의 첫 페이지를 다시 찾았다. 그렇게 다시 읽기 시작해서 레프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다 읽었다.
책의 제목과 작가의 이름만으로도 철학적 냄새가 물씬 나며 아마도 쉽지 않은 책일 것이라고 생각한 나의 선입견을 파괴하는 책이었다.
마지막 책장을 덮고 나서 가장 먼저 생각한 것은 이 책은 어른이 아니라 아이들 아니 이제 막 성인이 된 청소년에게 선물하고 싶어졌다.
이 책을 성인기에 접어든 청소년에게 먼저 권하고 싶어진 이유는, 이 이야기가 옳고 그름을 설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는 정답을 외우게 하지 않고, 선택의 순간을 보여주었다.
더 많이 가지려는 마음과 나누려는 마음, 계산하는 태도와 손을 내미는 태도가 어떻게 다른 결과로 이어지는지를 이야기로 들려줄 뿐이다.
청소년들은 설명보다 이야기에 더 솔직하게 반응한다.
그래서 이 책은 훈계처럼 다가오지 않고,
자연스럽게 마음속에 기준 하나를 남길 것 같다.
무엇을 가져야 하는가보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먼저 생각하게 만드는 점에서, 이 책은 아직 세상의 복잡한 언어를 배우기 전의 아이들에게 더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세상을 살아가며 반드시 마주하게 될 욕망과 선택의 순간 앞에서, 이 책의 이야기들은 조용한 나침반처럼 남아줄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조용이 막내의 방 책상위에 이 책을 놓아두었다.
설명은 하지 않았다.
읽으라고도 말하지 않았다.
괜히 말하면 조건이 될까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