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09.한파주의보 대신
이불주의보가 발령된 날

by 마부자

어두운 새벽에 몸을 일으켜 거실에 섰다. 베란다 너머 창가를 바라보며 짧은 명상을 했다. 그저 보고만 있어도 찬 바람이 피부를 찌르는 느낌이었다.


한파주의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얼굴로 바로 납득했다. 차 한 잔을 내려 서재 방문을 여는 순간이었다.


마치 현관문을 활짝 열어젖힌 것처럼, 차가운 공기가 거실로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왔다. 순간 깜짝 놀라 머그컵을 떨어뜨릴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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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를 보니 창문이 3분의 1쯤 열려 있었다.

암막 커튼은 길거리 홍보 풍선처럼 정신없이 펄럭이고 있었다.


‘여기가 실내였나 야외였나’ 잠깐 헷갈릴 정도였다.


급히 창문을 닫았지만 이미 들어올 만큼 들어온 냉기는 쉽게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잠옷 차림으로는 도저히 버틸 수 없어 극세사 잠옷에 후리스까지 껴입었지만, 서재는 여전히 북극 체험관 같았다.


결국 노트북을 들고 거실로 나와 소파에 앉았다. 이제 추위보다 더 무서운 생각이 고개를 들었다.

‘설마 내가 어제 창문을 열어 놓고 잔 건 아니겠지?’


아무리 정신이 없어도 이 추운 겨울에 서재 창문을 열어두고 잠들었을 리가 없었다. 만약 그랬다면, 그건 건망증이 아니라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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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괴감이 슬금슬금 올라왔다.


그런데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장면 하나가 있었다. 며칠 전 아내가 서재에 들어와 재즈를 듣는 나에게 문을 닫으며 했던 말. “방에서 쉰냄새 나요. 창문 좀 열어놔요.”


설마… 하는 마음으로 소파에 앉아 글을 쓰며 아침 해를 맞았다. 출근 준비를 하던 아내가 왜 거실에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한파주의보보다 더 싸늘한 시선으로 아내를 바라보며 확증하듯 물었다.

“어제 밤에 서재에 들어와서 창문 열어놨지?”


순간 아내의 표정이 굳었다. 흔들리는 동공도 분명히 봤다. 그러나 아내는 무슨 소리냐며 펄쩍 뛰더니 화장실로 직행했다.


함께 산 지도 어느덧 30년에 가까워진다. 심증은 차고 넘치지만, 결정적인 물증이 없을 때 우리는 이렇게 웃으며 넘어가는 법을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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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서재의 추위보다 더 서늘했던 건

진실이 아니라 침묵이었다.


출근하는 아내의 뒷모습에 서늘한 눈총을 쏘며 다시한번 진실을 물었더니 절대 아니라고 했던 답 대신 살짝 찡긋한 윙크로 대신했다.


아침을 먹고 오전 독서를 마치고 창밖에서 들어오는 해를 보니 따스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떨어진 계란도 살 겸 재활용 쓰레기를 들고 집을 나섰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한파주의보가 왜 ‘주의’가 아니라 ‘경고’에 가까운지 바로 이해했다.


찬 공기가 얼굴을 때리는 순간, 나는 밖으로 나간 사람이 아니라 나가려다 실패한 사람이 되었다.


외출은 삼십 초 만에 종료됐고, 재활용쓰레기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오늘 하루의 방향도 그 자리에서 함께 종료됐다.


한파주의보가 내려진 날, 가장 현명한 선택은 밖으로 나가지 않는 것이 아니라 나가려던 자신을 빠르게 포기하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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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곳에 있다가 따뜻한 곳으로 오니 잠이 쏟아졌다.


요 며칠 밤에 잠을 잘 못 잔 탓도 있을 것이다. 나는 잠시 눈만 붙이려는 마음으로 침대에 몸을 뉘었다.


분명히 잠깐 눈만 붙이려 했다. 아침의 소동과 외출 실패로 몸이 잠시 착각을 일으킨 것뿐이었다.


이불에 눕기 전까지도 나는 깨어 있는 사람의 자존심을 끝까지 붙들고 있었다.


하지만 이불은 언제나 그렇듯 사람 말을 듣지 않는다. 따뜻함이라는 가장 원초적인 설득으로 나를 조용히 포위했고, 나는 저항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그 순간부터 시간은 내 동의 없이 앞으로 흘러갔다. 눈을 떴을 때 방 안의 공기는 달라져 있었다.


오전의 각진 빛은 사라지고, 해는 이미 기울어 창가에 길게 누워 있었다.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하루도 나와 함께 나란히 누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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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를 확인하며 억울함을 느끼려 했지만,

이건 억울할 일이 아니라 내가 선택한 결과에 가까웠다.


한파주의보가 내려진 날, 밖으로 나가려던 시도는 실패했고 안으로 들어와 눕는 선택만은 완벽하게 성공했다.

오늘은 한파주의보가 아니라 이불주의보가 내려진 하루였다.


외출 자제, 움직임 최소화, 불필요한 결심은 모두 다음 날로 이월되었다.


그렇게 하루는 조용히 접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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