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파주의보가 발령됐다는 말을 들었을 때, 오늘은 베란다에서 창밖을 확인하지 않았다. 뉴스는 믿어도 내 체온은 못 믿기 때문이다.
대신 이불 속에서 오늘 하루의 가능성을 가늠했다. 가능성은 낮았고, 이불의 신뢰도는 높았다. 몸이 움츠러들자 움직임이 줄었다. 움직임이 줄자 생각이 늘었다.
사람은 원래 움직이지 않아서 철학자가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나는 이불속에서 철학자로 변해가고 있었다.
한파는 신체 활동을 억제하지만 정신 활동은 장려한다. 그래서 나는 괜히 지난 선택들, 하지 않아도 될 말들, 사지도 않았어도 될 물건들까지 차례로 떠올렸다.
추위는 기억력 향상에 도움이 된다. 대신 기분도 같이 또렷해진다는 부작용이 있다.
창밖에서 이삿짐 사다리 차가 짐을 오르고 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문득 생각했다. 이 추위에 누군가는 밖에서 일하고 있구나.
마음이 잠시 숙연해졌다. 마음속으로 그런 말을 하면서도 나는 이중적으로 바로 이불을 더 끌어당겼다. 존경과 현실은 늘 다른 방향으로 작동한다.
양심은 잠깐 떴다가 다시 꺼졌다. 대신 ‘그래도 나는 오늘 감사한 마음을 가졌잖아’라는 자기 합리화가 난방처럼 퍼졌다.
추운 날일수록 인간은 정신적으로 더 따뜻해지려고 애쓴다. 문제는 그 따뜻함이 대체로 말로만 끝난다는 점이다.
한파주의보라는 말은 묘하다. 실제로 뭔가 큰일이 벌어지는 건 아닌데, 공기 전체가 긴장한 느낌이다.
그런 긴장을 즐기며 그대로
이불과 한 몸이 되어 있었다.
이불은 오늘 하루 나의 최종 목적지였고, 나는 이미 도착한 상태였다.
그런데 그때 아내가 말했다. 볼링장에 데려다 달라고. 나는 반사적으로 말했다. 이 추위에 무슨 볼링이냐고. 말은 투덜이었지만 마음은 거의 비명에 가까웠다.
아내는 잠시도 고민하지 않고 말했다. 볼링장 안은 실내이고 볼링을 치기 시작하면 몸에 열이 나서 달아오르는데 밖의 추위가 무슨 상관이냐고.
그 말은 정확히 맞았고, 그래서 더 아팠다. 나는 논리로 설득당하는 인간이다. 정곡을 찔린 순간, 이불과의 유대는 그렇게 끝났다.
결국 나는 아내 손에 이끌려 집을 나서 볼링장으로 향했다. 어깨 통증을 이유로 볼링은 쉬는 중이라, 나는 롱패딩에 마스크까지 완벽 무장한 채였다.
모습만 보면 한파 피해자였다. 반면 아내는 이미 몸의 온도가 예열된 사람처럼 가볍게 움직였다.
볼링장에 도착하자 풍경은 명확했다.
나는 패딩 속에서 천천히 녹고 있었고,
아내는 반팔 차림으로 선풍기 앞에 섰다.
땀이 난다며 바람을 쐬는 모습을 보며 확신했다. 이 사람에게 추위는 날씨가 아니라 그냥 배경음악일 뿐이라는 걸.
그 순간 깨달았다. 열정은 난방보다 강하다는 걸. 한파주의보쯤은 가볍게 밀어낸다는 걸. 나는 오늘도 이불을 사랑했지만, 아내는 레인을 사랑했다.
추위는 나를 멈추게 했고, 열정은 아내를 움직이게 했다. 그리고 나는 오늘도 그 옆에서 조용히 배웠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생각했다. 한파주의보는 분명 발령됐는데, 오늘 하루를 관통한 건 추위가 아니라 대비였다.
나는 이불을 기준으로 하루를 설계했고, 아내는 볼링장을 기준으로 하루를 밀어붙였다. 두 사람의 체온 차이는 결국 삶의 태도 차이였다.
나는 오늘도 움직이기 전에 걱정했고, 아내는 움직이면서 열을 냈다. 나는 추위를 이유로 멈췄고, 아내는 열정을 이유로 더 빨라졌다.
그 덕분에 나는 롱패딩을 입고 인생을 관전했고, 아내는 반팔로 하루를 완주했다.
집에 와서 다시 이불을 덮으며 결론을 냈다.
한파주의보는 날씨 소식일 뿐이고,
나의 진짜 주의보는 게으름 쪽에 더 가깝다는 것.
다행히 오늘은 아내라는 이동 수단 덕분에 무사히 하루를 넘겼다.
아마 내일도 춥겠지. 나는 또 이불과 하나가 되려 할 것이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인정한다. 추위는 사람을 움츠리게 하지만, 열정은 사람을 웃게 만든다.
그리고 나는 오늘, 웃으며 이불 속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