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13.막내의 첫 월급이 도착 한밤, 추억도 돌아왔다

by 마부자

여전히 바람은 강했고, 창밖은 밀도 높은 찬공기로 가득했다. 아파트 너머 동편에서 번져오는 붉은 빛을 바라보며 베란다에 서서 잠시 명상을 했다.


책상에 앉아 독서를 통해 인생을 바꿨다는 젊은 청년의 이야기를 읽으며, 나는 이상하게도 그의 미래보다 내 과거를 더 많이 들여다보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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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새벽, ‘강박’이라는 단어를 붙잡고 앉아 그동안 내가 얼마나 열심히 나를 몰아세웠는지를 천천히 되짚어본다.


열심히 산다는 말 뒤에 숨겨둔 조급함 같은 것들까지.


그리고 오전 8시가 되면 어김없이 아랫집 반려견의 하울링이 시작됐다. 이제는 놀라지도 않는다.


그 소리는 내게 ‘자, 이제 책상으로’라고 말해주는 알람이 됐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고, 나는 하울링을 독서 신호로 받아들이는 쪽을 택했다.


어제부터 읽기 시작한 새로운 책의 마지막 장을 덮었다. 며칠 전엔 철학서 같은 우화를 읽었고, 그 전엔 동화처럼 보이지만 날카로운 비판서를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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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정말 동화 같은 책이었다.

내 마음도 덩달아 잠시 순해진 느낌이 들었다.


서평을 쓰고 하루 종일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오늘은 별다른 에피소드 없이 잠자리에 들겠구나 싶었다.


하지만 요즘 내 일기의 실질적인 주인공인 막내는 늘 그 예상을 보기 좋게 빗나가게 만든다. 작은 선물 같은 카톡이 도착을 했다.


며칠 전 막내가 첫 월급을 탔다. 벌써 한 달이 흘렀다는 사실이 조금 낯설었다.


함께 식사라도 하자는 말 대신, 오늘 저녁 퇴근길에 통닭을 사오겠다는 연락이었다.


월급날이면 술에 취해 들어오던 아버지의 얼굴이 먼저 떠오르기보다는, 이상하게도 늘 손에 들려 있던 노란 종이봉투가 먼저 기억난다.


아버지가 싫었던 마음과 통닭을 기다리던 마음이 한 봉투 안에서 묘하게 공존하던 시절이었다. 늦은 밤 그 봉투를 밥상 위에 올려놓는 순간, 집안의 공기는 순식간에 바뀌었다.


동생과 나는 말없이 닭을 해체했고, 그 결과는 늘 갈비뼈만 남은 완벽한 발골 수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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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집중력으로 아마 공부를 했으면

인생이 조금 달라졌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제 그 통닭을 막내가 사온다고 한다. 이상하게도 그 말을 듣는 순간, 통닭보다 시간이 먼저 도착했다.


눈시울이 붉어지는 걸 들키기 싫어 괜히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이럴 때 어른은 감정을 숨기는 기술만큼은 참 빨리 는다.


병원에서 퇴원한 뒤 튀긴 음식은 거의 입에 대지 않고 있다. 몸을 위해서라기보다는, 나름의 원칙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그 원칙을 잠시 휴가 보내주기로 했다. 먹고 죽더라도 오늘은 먹어야 하는 날이었다. 이건 음식이 아니라, 기억을 씹는 일이었으니까.


저녁까지 굶고, 문을 바라보며 기다렸다. 양손에 통닭을 들고 들어오길 기다리던 그 시절의 내가 잠시 겹쳐졌다.


시간은 흘렀는데, 기다리는 마음의 자세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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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열 시가 조금 넘어 막내가 들어왔다. 한 손엔 통닭 두 마리, 다른 한 손엔 캔맥주. 그 맥주는 나를 위한 게 아니라 본인을 위한 것이었다.


부모가 통닭을 먹을 때 옆에서 맥주를 마시던 풍경을 그대로 복사해온 셈이다. 가정교육이란 참 무섭고도 정확하다. 원하지 않아도 배운다.


40년 전의 나와 오늘의 내가 같은 자리에 앉아 통닭을 뜯는 기분이었다. 몸은 조심하라 말하고 있었지만, 마음은 이미 종이봉투를 뜯고 있었다.


오랜만에 먹은 통닭은 변함없는 맛이었다. 아니, 맛이 변했어도 나는 이미 40년 전의 통닭을 함께 씹고 있었을 것이다.


왜 하필 통닭이냐고 물으니 막내는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외식을 해야 하는데, 사실 내일 일본여행 가면 돈이 부족할 것 같아서 우선 이거라도 대접해드리려고요.”


음... 사회생활용 멘트는 아직 미완성된 아이였다. 그래도 그 솔직함이 막내답다 싶어 웃음이 났다.


통닭을 먹고 난 뒤, 막내는 커다란 캐리어를 꺼내 짐을 싸기 시작했다. 내일이면 친구들과 오사카로 떠난다.


이 아르바이트도 사실 그 여행을 위해 시작한 것이었다. 비행기표도, 숙소도 이미 준비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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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밤 막내는 한 숨도 못 잘 것이다.

여행 전날은 늘 그렇다.

가장 설레고, 가장 들떠 있고, 그래서 가장 잠들기 어려운 밤.


나는 그 설렘을 멀찍이서 바라보는 역할이 됐다.


잘 챙기라는 말을 남기고, 오랜만에 야식으로 부른 배를 부여잡고 잠자리에 들었지만, 잠이 오지 않는다. 결국 일기를 쓰기 위해 책상에 앉아 이 글을 쓴다.


첫 월급으로 무엇을 사야 할지 한참을 고민했을 아이가,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이 우리와 함께 먹는 통닭이었다는 사실이 마음에 오래 남는다.


비싼 선물도 아니고, 거창한 외식도 아니었지만 그 봉투 안에는 아이가 사회라는 문을 처음 열고 나와 우리 쪽을 한 번 더 돌아본 흔적이 들어 있었다.


어릴 적 내가 그랬던 것처럼, 막내도 그렇게 기억을 반복하고 있었다.


부모가 된다는 건 이런 순간을 조용히 받아들이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아이의 성장을 붙잡지 않고, 대신 그 마음만 가만히 품어보는 일.


첫 월급으로 사온 통닭은 그래서 유난히 따뜻했다.

기름진 음식이 아니라, 시간이 지나 다시 돌아온 마음의 맛 같았다.


오늘 하루는 그걸로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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