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의 창밖에서 강한 바람이 창을 두드렸다. 이제는 놀라지도 않는다. 겨울 새벽의 바람은 늘 이렇게 존재감을 과시한다.
뜨거운 차 한 잔을 들고 책상 앞에 앉았다. 몸보다 먼저 마음이 자리를 잡는 시간이다.
2025년 동안 수도 없이 곱씹었던 노력이라는 단어에 대한 생각을 글로 옮겼다. 같은 단어인데 삶의 위치가 달라지면 의미도 달라진다.
6월 이전의 노력과 이후의 노력은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땐 더 잘 버티기 위한 말이었고, 지금은 나를 덜 몰아붙이기 위한 말이 됐다.
천천히 밝아오는 창밖의 빛처럼 글도 서두르지 않고 써 내려갔다. 쓰고, 고치고, 다시 지우는 사이 어느새 새벽은 아침이 되어 있었다.
글은 늘 그렇게 시간을 데리고 간다.
수능을 끝낸 막내가 이른 아침부터 외출 준비를 했다. 처음 보는 풍경인데도 어색하지 않았다.
대학에 가면 등교는 어떻게 할까 했던 걱정은 역시나 내 쓸데없는 선제 불안이었다. 아이들은 늘 자기 리듬을 스스로 만든다.
사람에게는 각자의 루틴이 있다. 그리고 꼭 지켜야 할 순간에는 그 루틴이 초인적인 힘을 발휘한다는 것도 막내를 보며 새삼 알게 됐다.
필요할 때 인간은 생각보다 부지런해진다.
대구공항에서 출발하면 좀 늦게 나가도 될텐데, 아쉽게도 일본 간사이행 비행기는 부산에서만 뜬다고 했다.
동대구역에서 기차를 타고 김해공항으로 가는 꽤 복잡한 동선이었다. 그렇게 여행은 집을 나서기 전부터 이미 시작된다.
짐을 들고 현관을 나서는 순간, 아래층 반려견이 힘차게 울기 시작했다. 마치 막내의 여행을 공식적으로 배웅이라도 하듯. 우리 집의 마지막 알람은 늘 그 개다.
집 안에 다시 혼자만의 시간이 돌아왔다. 오랜만에 청소를 하고 책상 앞에 앉아 새로운 책을 펼쳤다.
임경선작가의 <글을 쓰면서 생각한 것들>을 펼쳤다. 얼마 전 나온 따끈한 신작이었다.
임경선작가는 내가 일기와 서평에서 자주 언급하는 작가다.
굳이 숨길 필요도 없다. 지금 좋아하는 작가를 세 명만 꼽으라면, 망설임 없이 첫 번째 이름에 올릴 사람이다.
작가의 팬이 된다는 건 단순히 책을 많이 읽는다는 의미는 아닌 것 같다. 그 사람의 문장을 따라 읽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는 문장보다 태도를 배우게 된다.
무엇을 쓰느냐보다, 어떻게 쓰느냐보다 왜 그렇게까지 쓰는지를 생각하게 된다.
좋아하는 작가의 글을 오래 읽다 보면
나도 모르게 문장의 결이 조금씩 닮아간다.
쉼표를 쓰는 방식이나 문장을 끊는 호흡, 감정을 숨기지 않는 태도 같은 것들. 그건 흉내라기보다는 자연스러운 동조에 가깝다.
그래서 나는 임경선작가의 필체를 좋아하고 또 닮고 싶어했다.
그녀의 글은 잔인할 만큼 솔직하고, 서슴없고, 눈치 보지 않는다. 언뜻 읽으면 기분이 나쁠 정도로 강하다.
그 시선은 작가를 잘 모르는 사람에게는 불쾌함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 불편함이 좋다.
글이 타협하지 않고 끝까지 자기 책임으로 서 있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이해 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 문장을 세상에 내놓는 태도에서 나는 읽는 사람의 기분보다, 쓰는 사람의 정직함을 먼저 선택하는 자세가 느껴진다.
그런 글은 괜찮다고 말해주지도 않고 잘될 거라는 말로 상황을 정리해주지도 않는다. 대신 지금의 상태를 그대로 바라보게 만든다.
그게 불편해도,
그 불편함까지 포함해서 책임지겠다는 얼굴로.
나는 작가의 그런 태도가 좋다. 글이 친절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것 같아서.
모든 문장이 다정할 필요는 없고 모든 생각이 쉽게 소비될 필요도 없다는 것을 그녀의 글은 묵묵히 증명한다.
결국 한 작가의 팬이 된다는 것은 그 사람의 문장을 좋아하는 것을 넘어 그 문장이 만들어진 태도까지 받아들이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무엇을 말하는가보다 왜 그런 말을 선택했는지를 이해하려 애쓰는 것.
쉽게 쓰지 않는 이유와 쉽게 위로하지 않는 이유를 함께 견뎌보는 쪽을 택하는 일이다.
그 작가의 문장을 따라 읽으며 내가 어떤 문장을 쓰고 싶은 사람인지 조용히 점검하게 되는 상태야 말로 그것이 팬이 된다는 말의 실제에 더 가깝다.
그래서 팬이 된다는 건 존경을 표하는 일이 아니라
그 태도 앞에 나 자신의 문장을 세워보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책장을 넘기며 나는 오늘도 조용히 한 가지를 배웠다. 좋아하는 작가의 문장을 읽는 일은 결국 나 자신의 문장을 더 정직하게 만들기 위한 연습이라는 것을.
특별한 사건은 없었지만, 좋아하는 작가의 책 한 권을 끝까지 읽고 그 생각을 문장으로 옮겼다는 사실만으로도 오늘 하루는 제자리를 찾은 느낌이었다.
읽고, 생각하고, 정리하는 일.
그 반복이 나를 조금 더 단정한 사람으로 만들어준다고 믿는다.
하루를 이렇게 마무리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오늘은 충분히 잘 산 하루였다.